한글이 야호????
한국에 와서 일반 어린이집을 거부하면서, 낮잠을 자지 않아도 되고 원어민이 상주하는 기관으로 옮겼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의 등원거부, 그리고 약 1년 동안에도 등원거부가 간간히 있어왔지만... 어쨌든 기관에서는 문제없이 잘 다녔던 6살이었다.
아이는 기관 생활은 무척이나 모범적이었고, 참았던 불안과 인내심을 집에 오자마자 터트렸는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오후 3시 반 무렵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는 증상이 나타났다.
'왜 이러지?'
하지만 증상이 반복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가 하원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두려웠고, 신기하게 3시 반 정도가 되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기관 생활은 잘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곳에서 무얼 배워오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 문제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게 또다른 미션이 주어졌다. 인생은 산 넘어 산이라던가?
어머니, 공룡이 한글과 숫자 공부를 신경써주세요. 원에서 매주 한글과 숫자 공부를 하지만 수업 시간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P.S. 그리고 가위질도 연습 좀 시켜주세요.
선생님은 매주 (체감상은 매일 같았다.) 알림장을 보내주셨다. 한 몇 개월은 솔직히 무시를 했다. 저녁 5시부터 11시까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소리를 지르거나 뛰어다님) 학습까지 하라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매일같이 (체감상) 아이의 한글, 숫자공부, 가위질을 연습시켜달라고 알림장이 오니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런 걸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한글을 뗐는지 곰곰히 생각했고, (부모님이 예림당에서 나온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셨고, 만 4세가 되기 전 스스로 한글을 떼었다. 읽는 정도만.) 아이도 그렇게 가르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저녁이나 주말에 <한글용사 아이야>를 틀어주었고, 아이가 본 회차에 맞춰 황금 단어카드도 출력해 집안 곳곳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저절로 한글 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이는 먹던 과자 봉지를 보며 큰 소리로 글자를 읽었는데...
"피카츄!"라고 하는 게 아닌가!
(과자 이름은 '포카칩'이었다.)
다군다나 '아이야'를 구분하지 못한건 더 충격!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ADHD인 우리 공룡은 '시지각 주의력'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시지각 주의력이 낮은 아이에게 통문자 학습을 시키고, 영상으로 한글을 익히게 시켰으니, 당연히 효과가 없는게 당연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한글을 어떻게 떼야하는지 정보를 찾다가, 한글은 아주 과학적인 글자라서 며칠만 공부하면 누구나 뗄 수 있다는 머릿말 글에 <기적의 한글 학습> 교재를 바로 주문했다.
그렇게 책이 도착하고, 아이의 한글 떼기 미션이 시작되었다.
미션은 불가능해보였다.
5분이면 끝날 공부였지만, 30분을 소리지르니 효율이 떨어졌다.
아이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견디며 배울 만큼의 인내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매일같이 알림장을 통해 선생님의 푸쉬를 받는게 힘들었다.
무조건 하루에 한 강을 했다.
<기적의 한글 학습>은 정말이지 저자의 말처럼 과학적이었는데,
첫날은 아야어여오요우유...를
그 다음날은 가갸거겨고교구규...를 배웠다.
아이는 3권을 할 때부터 자신감이 생겼고, 겹모음과 받침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책의 약 80%를 숙지하는데 성공했다. 거의 1주일에 1권씩 했기 때문에 두달이 되지 않아 책을 다 끝냈다.
아이가 한글이 익숙해질 때즘, 숫자 공부도 시작했다. <기적의 유아수학>의 B단계를 일부 구입해서 풀게 했는데, 이 것 또한 고행이었다. 5분이면 끝날 공부를 30분 소리질렀다.
'하지만 선생님한테 알림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이가 원에서 공부한 한글과 숫자 학습지를 받았는데, 선생님께서 가정학습으로 요구했던 한글과 숫자 공부의 수준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낮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기본적인 수개념 1부터 10까지 정도...를 익히길 원하셨던 것 같다.)
어쨌든 아이는 어설프게나마 겹자음과 받침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간단한 받아쓰기도 할 수 있었고, 숫자의 덧셈과 뺄셈, 그리고 구슬로 10의 자리 이상의 덧셈까지 빠르게 두어달만에 마스터했다.
어머니, 공룡이가 한글 수업과 숫자 수업 시간에 제일 큰 소리로 대답하고 정말 열심이에요. 아침에 등원하면 친구들에게 오늘의 식단표를 큰 소리로 읽어준답니다. 어머니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이에요.
보상은 달콤했다.
"이제부터 공룡이는 매일 이렇게 공부해야겠어."
남편이 아이의 공부를 돕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기 전까지 말이다.
남편은 공룡이가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내가 힘들면 본인이 공부를 시키겠다고 나섰다.
주말 오후, 나는 안방에 드러우워있고, 남편이 아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는 또다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누가보면 선행학습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나는 정말이지 화가 나서 안방문을 훽 열고, 교재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교재를 모조리 담아 책꽂이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하지마! 하지마!"
남편은 공부를 시켜야한다고 했고, 나는 안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시키면 잘 하잖아. 잘 따라오는데 공부를 시켜야지."
"이렇게 억지로 몇 살까지 할 수 있겠어? 기껏해야 초등학교 2학년 까지는 끌고 가겠지. 하지만 그 이후도 계속 이렇게 끌고 갈 수 있을까?"
아이는 그로부터 약 1년 후, ADHD 약을 먹기 전까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대신,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바다로 놀러가 마음껏 뛰어다녔고, 평일엔 소파를 오르내리고 TV를 보며 억눌렸던 긴장과 불안, 짜증을 발산했다. (물론, 내게도 마음껏 발산하고 말이다.)
아, 그 이후 선생님은 알림장에 적진 않으셨지만 아이가 쉬는 시간에 색칠하고 오린 작품을 가방에 꼬박꼬박 넣어 보내주셨다.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색칠과 가위질 연습을 시켜주신 매우 감사한 선생님이셨지만, 1년 동안 아이의 실력은 변하지 않았다. 색칠은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 것 처럼 신경질적으로 그어져있고, 가위질은 캐릭터의 모양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채 이리저리 뾰족뾰족하게 잘라져 있었다. (곡선으로 자르지 못함.)
처음에는 왜 쓰레기를 넣어주시지? 했다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가위질이 얼마나 엉망인지 보여주고, 가위질 좀 연습시키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이미 한글과 숫자 떼기 만으로도 GG 선언 상태였다. (참고. ADHD 아이들은 색칠을 아주 지루해하고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