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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Jul 29. 2023

나를 위한 근사한 대접

Chapter 14. 다이애나를 불러 차를 마셔도 좋다


"낮에 다이애나를 불러서 같이 차를 마시며 놀아도 된단다."     
"오, 아주머니! 역시 아주머니도 상상력이 있으셨군요. 그게 아니면 제가 그걸 얼마나 바랐는지 절대 모르셨을 테니까요. 신나기도 하고 어른이 된 기분도 들어요. 탁자 상석에 앉아 차를 따르는 제 모습이 상상돼요. 그러고는 다이애나에게 설탕을 넣겠냐고 묻는 거예요! 당연히 설탕은 넣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요. 과일 케이크를 한 조각 더 먹으라고 접시를 밀어주고 잼도 더 권하고요. 오, 아주머니, 생각만으로도 신나요."     
- 빨강머리앤 중   

  

어느 날, 마릴라는 앤에게 다이애나를 초대해 오후에 마시는 차를 대접해도 좋겠다고 말하는데, 앤은 무척이나 흥분하고 만다. 두 소녀로서는 어른이 되어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을 테다.     


앤은 과일 케이크, 진저브레드, 쿠키, 체리 잼 등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한 티타임을 준비했다. 기분이 무척 고무되었던 것은 다이애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은데, 다이애나 역시 두 번째로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 초대에 응한 것이다. 다이애나는 부엌으로 들어오는 대신 현관문을 두드려, 정중하게 초록 지붕 집으로 들어온다. 다락방에 모자를 벗어 놓고 거실에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중한 손님 역할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고상하고 우아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초록 지붕 집 유적지 1층에는 거실, 응접실 그리고 부엌이 있다. 초록 지붕 집의 거실과 응접실에는 화려한 벽지와 초록색 꽃무늬 카펫, 그리고 고급스러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다. 사치는 부리지 않지만 정갈하고 바지런한 마릴라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초록 지붕 집에서 가장 화려한 공간들이지만 정작 소설에서는 몇 번 등장하지 않는다. 목사님 신방이나 후원회 모임, 그리고 먼 곳에서 손님이 왔을 때나 응접실에서 식사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주로 머무는 공간은 투박한 부엌이었다. 특별한 손님이 없는 한 가족들은 이곳에서 식사하고 대화를 나눈다. 부엌의 한 가운데에는 장작을 때는 오븐이 있어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븐 외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식탁과 매슈가 작업복을 입은 채로 막 누워도 되는 저렴한 소파가 있다. 부엌에서 마릴라와 앤은 요리나 설거지, 바느질하고 매슈는 소파에 눕는다. 그리고 앤의 입은 쉴 새 없이 떠드는데 그 소리가 매슈 남매에게는 듣기 좋았다.     


부엌 옆에는 2개의 작업 공간이 딸려있다. 하나는 유제품을 만들던 작업실이고, 다른 하나는 팬트리이다. 팬트리 한쪽에는 선반이 있고 그곳에는 장미꽃무늬 찻잔 세트가 전시되어 있다. 흰 도자기에 섬세한 장미가 자주색으로 그려진 그릇들이다. 마릴라가 아끼며 목사님 심방이나 후원회 모임에서나 꺼낸다. 팬트리 너머 장미꽃무늬 찻잔 세트를 보니 앨런 목사 부부의 심방 때 꽃으로 정성껏 테이블을 꾸몄던 앤의 모습이 생각났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이에게 대접하고 싶은 앤의 마음이 느껴졌다.


초록지붕집 유적지(Green Gables Heritage Place) 1층 팬트리에는 여러 식기류와 주방 도구를 볼 수 있다. 장미꽃무늬 그릇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여행할 당시 나는 18평 남짓한 작은 학생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손님이 오면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딱딱한 부엌 의자에 앉혀두고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곤 했다. 중고가게에서 머그잔에 커피 믹스를 타거나 저렴한 티백을 우려주었다. 예쁜 찻잔과 식기류는 고급 카페나 레스토랑에 갈 때만 사용하는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는 매번 갈 형편이 되지 않으니 그렇게 티타임을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유학생이 추석을 맞아 송편을 먹으러 오라며 자신의 아파트에 초대했다. 몇 년 만에 먹어보는 송편인지, 모처럼 떡을 먹을 생각에 큰 기대를 하고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떡을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아냈다. 그리고 세트로 맞춰진 찻잔에 옅은 홍차를 내려주었다. 세트인지 앙증맞은 포크까지 내어주었다. 그런 다과상을 마주하고 마주 앉으니 괜스레 행동이 정갈해지고 조심스러워졌다. 일회용 팩에 담은 채, 떡을 먹곤 했던 내가 조금 쑥스러워졌다. ‘이런 그릇은 비싸겠지. 우리 집은 집도 좁으니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찻잔을 알아보면서 예쁜 찻잔은 하나에 몇만 원이면 산다는 것을 알았다. 몇만 원만 쓰면 하루에 두 번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우아하게 행복해질 텐데, 그 돈을 아끼자고 중고가게에서 가져온 크리스마스 그림 머그잔을 선선한 가을에도 사용하는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것을 스스로 해주기보다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은 꽤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최근 내가 <빨강머리앤>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이 빨강머리앤 그림이 그려진 머그잔과 작은 접시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그 선물을 들고 집으로 오니 집의 부엌 싱크대에는 이미 자주 쓰는 컵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국 유학생 시절부터 쓰던 크리스마스 그림의 머그잔 몇 개와 개구리가 사용하는 캐릭터 컵들이 한가득하였다. ‘자리가 없으니 일단 찬장에 넣어놨다가 쓰던 컵이 깨지면 사용하자’라는 생각으로 찬장에 보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내가 좋아하는 빨강머리앤이 잔디밭에 누워있는 머그잔에 커피를 내리고, 작은 접시에는 쿠키를 몇 개 담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여유 있게 나만의 티타임을 가졌다. 마치 앤이 다이애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차를 준비했던 그것처럼 말이다.    


 








Q. 오늘 잠시, 나를 위한 티타임을 가저보는 건 어떨까요? 좋아하는 차를 우려내 느긋하게 향을 맡고, 색을 바라보며 근사한 대접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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