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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09. 2023

부족해도 괜찮아!

Chapter 21. 빨강 머리처럼 싫은 건 없을 줄 알았어요


"앤 셜리, 머리를 어떻게 한 거니? 저런, 초록색이잖아!”
“네, 제 머리는 초록색이에요. 빨강 머리처럼 싫은 건 없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초록색 머리는 그보다 열 배는 더 끔찍해요. 아, 아주머니, 제가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실 거예요.”     
<빨강머리앤> 중     




앤은 아름다움을 동경했고 갈망했다. 앤은 다이애나와 마음의 벗이 되고 싶어 했는데, 다이애나는 아주 예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눈과 머리는 까맣고 볼은 장밋빛인 아이였다. 후에 뚱보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렸을 때의 다이애나는 토실토실 볼에 살이 올라 아주 귀여웠으리라 짐작된다.      


반면, 앤을 처음 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런, 깡마르고 못생긴 아이로군요. 주근깨는 어쩌면 이렇게 많을까? 머리는 홍당무처럼 빨갛구나! 저런 저런….’ 때로는 린드 부인처럼 마음속의 말을 필터 없이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외모에 대한 지적은 앤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앤은 자신의 빨강 머리를 가지고 놀리는 사람에게 화를 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낸들, 빨강 머리는 바뀌지 않았다. 급기야 앤은 행상인에게 검은색으로 머리를 물들여주는 염색약을 사게 된다. 칠흑같이 까맣고 아름다운 머리를 갖게 될 꿈에 빗으로 염색약을 발랐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그녀의 머리는 오묘하고 칙칙한 갈색이 도는 초록색이었다. 더군다나 원래의 빨강 머리가 얼룩덜룩 남아있어 한층 더 괴기한 분위기를 풍겼다. 절대 물이 빠지지 않는다는 행상인의 말만은 진짜였는지 아무리 머리를 감아도 초록 물은 빠지지 않았다. 결국, 마릴라는 앤의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고, 앤은 허수아비 같은 머리를 하고 학교에 가야 했다.     


앤은 외모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하고 갖은 애를 써보아도 흰 피부와 금발을 가진 루비나 검은 머리와 보조개를 가진 다이애나처럼 되지 않았다. 앤의 현실과 이상의 간격은 너무나도 컸고, 괴로워하고 이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력도 했다. 하지만 앤은 자신의 한계를 또렷하게 직면하게 될 뿐이었다.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도리어 앤으로 하여금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했고 불가능한 일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염색약 사건은 앤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메타인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확인 사살이었다.     


나는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탓에 매우 경직된 사고로 살아왔다. 스스로 정한 기준과 목표를 절대 낮추거나 쉽사리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인생의 초반에는 나의 큰 장점이 되어주었다. 힘들고 지루한 공부를 잘 해냈고, 환경에 굴하지 않고 여러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유연하지 못하고 융통성 없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도달하기 힘든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벌어질 뿐이었고, 나의 자존감과 정체성은 점점 부정적인 방향으로 흔들렸다. 내가 꿈꾸고 상상하는 나와 현실의 나는 차이가 너무 컸다. 그래서 자신을 들들 볶아댔다. 그리고 나의 환경과 능력이 이상을 충족시켜주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PEI 기념품샵에서 볼 수 있는 기념품. 빨간머리와 못생긴 얼굴을 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나의 한계와 능력을 모두 떳떳하게 인정하고 수용하고,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워 지속해서 발전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수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였다. 나는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 A와 B를 30대 중반이 되어서 다시 만났다. 같은 꿈을 꾸고 노력했던 A와 B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동갑인 A와 B는 모두 한 공무원 직렬에 도전했다. 대학 졸업반에서 시작한 수험생활은 20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A와 B는 모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보습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아르바이트를 끊임없이 해야 했기에 대학 생활은 추억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여자로서 취업할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공무원만 된다면 신붓감으로 인기도 많을 테고, 좋은 직업을 가진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모든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A와 B는 모두 연애도 하지 않았고, 공부에만 몰두했고 매번 아깝게 몇 점 차이로 떨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몇 점만 더 받으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공무원이라는 꿈은 한 발짝 나아가면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A는 많은 고민 끝에 수험생활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했던 국사 과목으로 사교육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때로는 공무원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해 몇 년 동안은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강사 생활을 하며, 여러 사교육 시장에 대한 정보를 들으며, 방문 학습 교사나 공부방 창업 등 여러 경제 활동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렇게 강사로서 생활하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편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는 신혼집에서 공부방을 차려 일하며 아이도 한 명 낳아 키웠다. A가 마흔인 지금 그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열심히 일하며 신도시 내 집 마련에도 성공했다. 1년에 한두 번은 국내나 가까운 동남아 여행을 다니며 살고 있다.     

B는 많은 고민 끝에 수험생활을 계속했다. 구립 도서관에 도시락을 싸서 다니며 공부를 하여 최소한의 비용으로 계속해서 시험을 치렀다. B의 사정을 아는 A가 일자리를 소개해주기도 했지만, B는 그 일자리들을 공무원직과 비교했다. ‘월급이 너무 적다.’, ‘야근이 많다’라며 단점을 찾아서 거절하거나 금방 그만두었다. B는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가진 여성이 되고 싶지, 불안정하고 낮은 자리에서 차근차근 쌓아 올라간다는 것은 애초에 B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B에게 남자를 소개해주는 때도 많았다. 하지만 B는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싫다’, ‘자기 주관이 없어서 싫다’라며 모두 거절했다. 자신이 공무원만 되면 만날 수 있는 배우자가 달라지는데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B도 마흔이 되었다. 어떤 직업적인 경력이 없고, 연애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다. A는 자신이 사는 신도시에 개발 호재가 있다며, 소형 아파트 내 집 마련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B는 서울이 아니라며 신축 아파트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신도시 호재로 A의 자산은 배가 되었고 B는 여전히 부모님의 집에서 살고 있다. B는 때로 자신의 현실에 현실을 자각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목표(직업, 배우자, 거주지)를 포기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 없어 늘 제자리에 머물러있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유연하게 목표를 바꾸어 지속해서 작은 성취를 이루어나가는 편이 거대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한 번에 따라잡으려고 무리하는 쪽보다 결과도 좋았다. 앤은 금발이나 흑발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거나 루비나 다이애나 사진을 비전 보드로 만들어 붙이거나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나는 금발이 될 수 있다’를 100번씩 필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잘하는 것이 집중하였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내면을 가꾸던 앤은 에이본리 학교를 졸업할 즈음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인지 앤은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고, 자신 있게 걸었다. 야외를 뛰어다니지 않아서인지 주근깨는 깨끗이 사라졌다. 게다가 린드 부인이 위로해주었던 말처럼 앤의 머리는 빨강 머리에서 적갈색 머리로 살짝 톤다운이 되었다.     


뛰어나게 예쁘지 않아도, 특별하게 재능있지 않아도, 감탄할만한 대단한 직업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 야속하지만 사회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건강하다. 나이를 든다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은 오늘은 어제보다 현실의 나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평범한 나와 안정적으로 사는 법을 오늘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Q.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한 콤플렉스가 있나요?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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