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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06. 2023

나의 키다리 아저씨

Chapter 19. 제일 좋은 손님방에서 묵게 해주마




조세핀 할머니는 약속대로 우리에게 손님방을 주셨어요. 방은 정말 우아했지만, 손님방에서 자 보니 어쩐지 제가 늘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아주머니.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그런 나쁜 점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제는 조금씩 알 거 같아요. 어릴 땐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소원들도 막상 이루어지면 상상했던 절반만큼도 멋지거나 신나지 않는 거 같아요.    <빨강머리앤> 중     



앤이 에이본리에 잘 적응해나갈 무렵, 다이애나의 고모할머니인 조세핀 배리가 에이본리에 등장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강남에 사는 할머니가 강원도 산골에 사는 조카의 집에 한 달 정도 놀러 온 셈이다. 조세핀 배리 할머니는 자기 말과 다른 사람은 절대 신경 쓰지 않는 다소 이기적인 노인네이다. 생긴 건 어떤가. 마른 몸에 엄하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인상까지 풍긴다. 그런데도 조세핀 할머니는 돈이 많으므로 다이애나의 집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받는 존재였다. 엄격한 다이애나의 어머니, 배리 부인조차 어떻게 할머니께 다이애나의 과외비라도 도움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살뜰히 모시는 분위기이다.      


이 꼬장꼬장한 조세핀 할머니는 앤에게 큰 흥미를 느꼈고, 한 달이 넘도록 에이본리에 머물며 앤과 대화를 나누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조세핀 할머니는 샬롯타운으로 돌아가며 앤과 다이아나를 샬롯타운으로 초대해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손님용 방에서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다.     


소설에서는 소박한 에이본리에서의 일상이 주를 이루지만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에피소드가 바로 조세핀 할머니의 초대로 앤과 다이애나가 샬롯타운에 간 일이다. 샬롯타운에서 조세핀 할머니와 보냈던 나흘의 시간은 앤 인생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힐 정도로 근사하고 설렜던 시간이었다. 으리으리한 저택 '너도밤나무 집'도 시골 아이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응접실에 남겨진 두 아이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이런 대화를 했다. “궁전 같지 않니? 조세핀 할머니 댁에 처음 왔는데, 이렇게 으리으리한 줄 몰랐어. 줄리아 벨이 이걸 봐야 하는데. 자기네 집 응접실을 엄청 자랑하잖아.”라고 다이애나가 속삭이자 앤은 이렇게 말한다. “벨벳 양탄자야. 커튼은 실크고! 내가 꿈꾸던 것들이야, 다이애나.”     


실제로 샬롯타운에는 조세핀 할머니의 ‘너도밤나무집’의 모티브가 된 집이 있다. 비콘스필드(Beaconsfield)라는 이름의 집인데,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한다는 이야기에 반가워 바로 투어를 했다. 1877년에 지어진 이 고급스러운 빅토리안 양식의 집은 현재에도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앤이 더 상상할 여지가 없다고 표현했을 만큼 화려한 벽지와 카펫, 각종 가구와 예술작품으로 가득한 집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정교한 무늬로 가득 찬 집에 들어서서일까? 한창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16개월 아이도 꽤 집중하며 투어에 참여했다.     


비콘스필드(Beaconsfield) 저택의 내부 사진. 고급스러운 카페트와 벽지, 가구, 조명, 장식품 등이 화려하다


이후로도 조세핀 할머니는 앤을 잊지 않고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크리스마스 발표회에서 신을 신발이 없어 난감해했던 앤에게 덧신을 보내기도 하고, 앤과 친구들이 '이야기회'에서 썼던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주는 독자가 된다. 앤이 샬롯타운의 퀸 학원에 입학시험을 치를 때, 머물 곳을 제공하고 퀸 학원에 재학하는 동안 살 수 있는 명망 있는 하숙집을 구해준 것도 모두 조세핀 할머니였다. 조세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앤에게 유산까지 남겨준다. 매슈의 죽음과 에비 은행 부도 사건으로 초록지붕집의 가세가 기울어져, 대학을 포기하였던 앤은 조세핀의 유산 덕분에 다시 학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집에 사는 부자 할머니가 있다면 어린아이에게는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을까? 조세핀 할머니는 누구나 꿈꾸었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삶이 너무 막막하고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짠하고 나타나 도움을 주는 존재 말이다. 물론, 이런 존재에 대한 갈망은 실현되기 어려운 로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사주나 운세에서 '귀인'이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나타나는지 자주 언급하는 걸 보면 우리의 조상들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너도밤나무’ 저택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 빅토리아 공원을 돌았다. 이 공원 역시,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데, 앤과 다이애나가 조세핀 할머니와 함께 빅토리아 공원을 마차를 타고 돌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해안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산책하였다. 잠시 유모차를 멈추고 아이는 공원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쌀과자를 먹기도 했다. 잠시 돌에 걸쳐 앉아 바닷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참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공원을 걸으며 조세핀 할머니와 같은 존재에 대해 생각을 했다.     


나의 유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조세핀 할머니 같은 친척들이 있었다. 집에서는 엄마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학교에서는 소외되고 이상한 아이로 살았지만, 외가댁에만 가면 평범하고 행복한 아이가 될 수 있었다. 외가댁에는 옆집과 앞집에 친척들이 모여 살았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놀아주는 재미,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사촌들과 놀던 즐거움이 있다. 집에서 음식을 모두 만들어 먹던 시절, 어른들이 손이 큰 덕에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엌의 음식은 늘 풍족했다.     


한 번은 외삼촌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피자를 사준 적이 있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라 쭈뼛거리고 있으니, 나이프를 들어 쓱쓱 잘라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처음 먹어본 피자는 웬 희한한 맛이었다. 그 맛이란 우유 향이 나는 고무를 씹는 느낌이었다. 피자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는 친척 어른들에게 몇 번의 피자를 더 얻어먹었다.     


그 외에도 나와 동생을 데리고 여의도 수영장이나 놀이공원을 데리고 가주거나, 계곡에서 튜브 보트를 태워주거나, 근사한 장난감이나 유행하는 옷을 사준 것도 모두 엄마의 손아래 형제들이었다. 외삼촌은 차를 사서 나와 동생을 태워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하였다. 그래봤자 낡은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정도였지만 높은 곳에서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거나 능숙하게 운전하는 삼촌의 모습을 바라본 것들이 모두 추억이었다. 집 근처를 지나다 우리 생각이 나서 떡볶이를 사서 들리는 삼촌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흡입하기도 했다. 엄마는 미원 덩어리라며 경멸해 마지않는 학교 앞 떡볶이였기에 집에서는 먹을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음식이다.  

   

이모 중 한 명은 취업하고 내게 선물을 사주었다. 가지고 있는 아이가 흔치 않았던 미미의 집이었다. 이모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선물에 우리 가족은 안방에 모여 다 같이 상자를 뜯었다. 분홍색 플라스틱의 미미의 집은 인형을 눕힐 수 있는 침대와 인형 옷을 걸 수 있는 옷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인형이 없었다. 상자를 몇 번이고 뒤진 끝에 우리는 상자에 작게 적혀져 있는 ‘인형 미포함’이라는 글씨를 찾아냈다. 장난감을 사본 적이 없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모가 실수한 것이다.      


나에게는 마론 인형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주인 없는 인형의 집만이 내 방을 차지했다. 하지만 나는 햇빛이 들지 않는 좁은 방에서 미미의 집을 가지고 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텅 빈 미미의 집을 펼쳐놓고 100원을 주고 산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종이 인형의 옷을 옷걸이 걸 수도 없고, 종이 인형을 식탁에 앉힐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남들은 가지지 못한 물건을 가졌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한 경험들은 부모의 방임으로 인해 낮아질 대로 낮아져 버린 나의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부모라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평범한 것들은 나에게는 하나하나 기억에 남을 만한 큰 이벤트였다. 그렇게 내 삶에 조세핀 할머니처럼 잠시 등장하였지만 큰 위로와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떠올리며 감사했다.     








Q. 당신에게도 '키다리아저씨' 같은 존재가 있었나요? 한번 생각해보아요. (예. 학교 선생님, 교회학교 선생님, 선배님, 이웃 아주머니 등)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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