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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05. 2023

'라떼는' 조언이 필요할 때

Chapter 18. 용서했더라면 좋았을걸



“싸웠어. 존이 사과를 했지만 내가 받아주지 않았지. 시간이 좀 지나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지만 일단은 혼을 내주고 싶었단다. 그때 내가 단단히 화가 났었거든. 그런데 존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 브라이트 집안사람들은 자존심이 아주 세거든. 내내 후회했단다. 기회가 있었을 때 용서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늘 생각했지.”
-빨강머리앤 중     



무려 9권이라는 방대한 속편들을 미처 읽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를 위해 <빨강머리앤> 이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매슈가 사망하고, 마릴라의 건강이 악화하자 앤은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에이본리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것으로 <빨강머리앤>은 끝난다. 마릴라를 도와 초록 지붕 집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린드 부인은 남편의 사망으로 미망인이 되었고, 각자 홀로 남겨졌던 마릴라와 린드 부인은 살림을 합쳐 한집에 살며 서로 의지하며 살기로 한다. 때마침(?) 부호인 조세핀 할머니가 앤에게 약간의 유산을 물려주면서 대학 등록금까지 해결된 앤은 레드몬드 대학에 입학한다. 이때에도 길버트는 앤에게 간절히 구애했지만, 앤은 여전히 철벽을 치고 있었다.     


사실 앤과 길버트의 연애는 순조롭지 않았다. 앤은 철벽을 쳤고, 길버트는 한결같이 앤을 좋아했다. 가장 흥미 있는 설정은 길버트와 길버트 아버지는 가계로부터 내려오는 '철벽녀’를 좋아한다는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길버트 아버지는 당대 에이본리 최고의 쌀쌀맞은 철벽녀인 마릴라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고집이 세도 너무 셌던 마릴라는 적당한 밀고 당기기가 아니라 철통같은 방어를 해버렸고, 길버트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몽고메리가 실제로 교사로 근무했었던 작은 학교 Lower Bedeque School이다. 당시, 앤과 길버트도 비슷한 시골 학교에서 공부하며 서로 티격태격했을 것이다.


인기가 많았던 길버트 역시 본인 좋다는 여자들을 다 제치고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제일가는 철벽녀 앤에게 끈질긴 구애를 한다. 앤은 길버트를 거부하는데, 마릴라가 적절한 시기에 개입해준다. 적당히 튕기다 받아주라는 조언이었다. 그때 못 이기는 척, 길버트 아빠랑 결혼할 걸 너무 후회된다는 노처녀 마릴라의 진심 어린 충고였다.     


샬럿타운에서는 <앤과 길버트>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볼 수 있었는데, 앤이 에이본리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내용이 담긴 <에이본리의 앤>과 레드몬드 대학을 다니다 길버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담긴 <레드몬드의 앤>, 두 권의 속편을 적절하게 각색한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와 함께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번갈아 한 명씩 공연을 봤다. 관객의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다시 한번 함께 웃고 울며 모두 추억에 흠뻑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앤 & 길버트> 뮤지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바로 마릴라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앤에게 조언하는 장면이었다. 마릴라와 길버트 아빠의 연애사는 몇 문장으로 짧게 소개된다.     


참 잘생긴 청년이야. 지난 일요일에 교회에서 봤는데, 키도 크고 남자답더구나. 그맘때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존 브라이트도 멋진 아이였거든. 우린 아주 친한 친구였단다. 사람들은 존이 내 남자친구라고들 했지. 


길버트의 청혼을 고민하는 앤에게 마릴라는 조언을 건넸다. 분명히 마릴라는 영어로 노래를 불렀지만,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이런 노래가 들렸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니가 타는 그 차 
그 차가 내 차였어야 해
니가 차린 음식 
니가 낳은 그 아이까지도 
모두 다 내 것이었어야 해     
박진영 <니가 사는 그집> 중     


마릴라의 진심 어린 충고로 앤은 길버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국 앤과 길버트는 결혼하게 된다. 마릴라는 길버트의 아빠와 에이본리라는 작은 마을에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강제로 옛 연인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사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혼기를 놓치고 미혼인 오라버니 매슈와 함께 초록 지붕 집을 꾸렸고, 단짝 친구였던 린드 부인은 무려 10명의 자식을 낳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렸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마릴라가 앤에게 길버트를 받아주라고 호소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여운에 남았다.     


오지랖 부리는 사람을 무례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인지 나는 그토록 진심 어리게 나를 걱정해주고 조언해준 사람을 별로 만나본 기억이 없다. 나의 부모는 과도하게 집착하고 통제하거나 방임하고 무책임했다. 나보다 몇십 년 앞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지혜나 치트키 없이 온몸으로 부딪혀 인생을 살다 보니 상처투성이, 실수투성이, 실패투성이인 인생이었다.   

   

가끔 ‘아, 그때 그분이 이런 의미로 나한테 이야기했던 거구나.’라는 깨달음이 오기도 한다. 가족이 아니기에 남인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만큼의 충분한 신호를 주었던 것이 어린 나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못했다. 알아들을 만큼의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했을 것이고, 또는 나만의 틀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한 마디씩 해주었던 좋은 어른들과 선배들 덕에 아주 많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원 가정에서 성장한 동네 아기 엄마가 있었다. 얼핏 듣기에는 그 시부모님이 아기 엄마의 행동을 많이 지적하고 가르치는 것 같았고, 꽤나 스트레스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기 엄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친정에서는 배우지 못한 살림이나 교양 지식을 시부모님을 통해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이다. 시부모님은 기회가 될 때마다 망고와 같이 익숙하지 않은 과일을 자르는 법이라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고급스러워 보이게 쇼핑하는 방법, 여행 가방 꾸리는 법 등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계셨고, 아기 엄마는 감사하게 배우고 있었다.     


오지랖이라며 꼰대라며 조언을 거부하고 싫어하기보다, 한번 어른의 지혜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Q. 나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던 조언이 있었나요?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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