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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04. 2023

첫인상 만으로 오해했을 때

Chapter 17. 홍당무! 홍당무!





"홍당무! 홍당무!"
앤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길버트를 봤다. 쳐다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앤은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앤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길을 길버트에게 던졌고 화가 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다음 '퍽'하는 소리가 났다. 앤이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쳤고 석판이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에이본리 학생들은 늘 이런 소동을 좋아했다. 모두 놀라면서도 신나서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빨강머리앤 중     


앤은 11살에 미래의 남편을 만난다. 서로 앙숙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조금씩 호감을 느끼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는 전형적인 로맨스 클리셰를 따르는 이야기로 말이다. 사건의 발달은 이러했다. 길버트는 매우 잘생기고 키가 큰 매력적인 남자아이였다. 길버트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한데, 새로 온 전 학생 앤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길버트는 앤에게 주의를 끌고자 노력해보지만 실패하게 되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바로 앤의 머리카락 색깔을 두고 놀린 것이다. 사건은 홍당무라고 놀림을 받은 직후에 일어나는데 분노한 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리쳤다.     


이 사건도 사건이지만 나는 아이들이 열심히 들고 다니며 집중해서 무언가를 쓰던 석판에 관심이 더 많았다. 무엇이든 귀했던 시절, 아이들은 연습장이 아니라 석판(Slate)을 들고 학교에 갔다. 작은 물병에 물을 담아 글씨를 썼다 지우기를 하며 아이들은 수학 문제를 풀고 단어 공부를 했다.   

   

요즘 버전이라면 아이패드로 때려서 액정이 깨졌으려나? 혹은 아이패드는 너무 비싼 나머지 다혈질 앤도 벌떡 일어섰다가도 차마 때리지 못하고 화를 속으로만 삭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길버트는 의도치 않게 앤의 콤플렉스를 건드려 폭발하게 했다. 길버트는 다이애나의 머리가 까맣다고 '까마귀'라고 놀린 전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앤의 붉은 머리는 전체 인구의 1~2%밖에 되지 않는 희귀한 색채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창백한 얼굴, 주근깨, 옅은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는데, 앤은 전형적인 붉은 머리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앤의 콤플렉스들이다.     

앤은 어디를 가나 위축되고 소외되었다.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에는 고아여서, 초록 지붕 집에 와서는 또래 여자아이들과 외모가 다르고 독특해서, 더군다나 마릴라의 똥고집으로 옷까지 또래 가운데서 튀고 있었다. 길버트는 의도치 않았지만 그런 앤의 콤플렉스를 건드렸고 앤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길버트를 한 대 때려버렸다.      


앤은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즉,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불행과 행복이라는 양극단으로 사람과 상황을 구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앤은 자신에게 한 번 실수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앤은 길버트의 실수를 시간이 지나도 받아들여 주지 못했고, 길버트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었다. 앤의 입장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더욱 넓은 관점으로 보면 본인의 세계를 좁혀 대인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무려 5년 동안, 작은 에이본리 학교와 퀸학원을 함께 다니며 앤은 길버트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몽고메리 출생지(L.M. Montgomery Birth Place)에 전시된 앤의 인형들과 조각이불(Crazy Quit). 앤의 인형은 하나같이 주근깨가 가득하고, 투박한 옷을 입


소설의 중반, 다시 한번 로맨스 클리셰가 등장한다. 바로 곤란에 빠진 철벽녀 여주인공에게 남주인공이 우연히 나타나 구해주는 장면이다. 연못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앤을 우연히 길버트가 발견한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앤은 길버트가 내민 손을 잡고 길버트의 배를 탔고, 그렇게 나루터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앤, 나 좀 봐.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예전에 네 머리를 가지고 놀린 건 정말 미안해. 널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야. 그냥 장난이었어. 그리고 이제 오래전 일이잖아. 지금은 네 머리가 아주 예쁘다고 생각해. 정말이야. 우리 친구로 지내자.     


그 순간 앤의 눈에 수줍은 듯 간절한 길버트의 적갈색 눈이 참 잘생겼다는 사실이 들어왔다. 그리고 심장이 이상하게 조금씩 두근거렸다. 사실 길버트는 매우 매력적인 소년이었다. 똑똑했고 리더십이 있었고 잘생겼다. 그리고 앤은 그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길버트가 자신을 놀렸던 기억을 떠올렸고, 2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분노를 떠올려냈다.     


나는 앤의 경직된 생각을 보며 나를 많이 돌아봤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기능적이었던 원 가정을 평범한 가정으로 바꾸기 위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질주해가도 목표는 신기루처럼 저만치 더 멀리에서 아른거렸다. 스스로 엄격해졌고 목표에 사로잡혔고 융통성이 없었다. 이런 성향은 내가 삐뚤어지지 않고 어느 정도 남들이 사는 것만큼 살도록 만들어주었지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꺾이면 꺾였지 절대 구부러지지 않는 성향을 남겨주었다.     


앤이 처음부터 유연하게 사고를 전환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분노와 실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객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오자마자 이웃 린드 부인이 앤을 보러 온 일이 있었다. 린드 부인은 따뜻하고 정 많고 봉사 정신이 뛰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말이 너무 많고 오지랖이 심하고 소문내는 것을 좋아하는 아줌마였다. 린드 부인은 앤을 보자마자 필터를 거치지 못한 채 이런 말이 튀어 나와버렸다.     


이런, 주근깨가 어쩜 이렇게 많니? 깡마르고 못생긴 아이로군요!   

 

이 말을 들은 앤은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어른인 린드 부인에게 배로 갚아주었다. 린드 부인이 얼마나 뚱뚱하고 무례한지를 끄집어낸 것이다. 앤은 린드 부인을 조상의 원수 대하듯 발을 구르고 입술을 파르르 떨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증오에 가득한 마을 쏟아내며 막말을 했다.     


하지만 점차 앤은 성장했다. 앤은 초록 지붕 집에서 자신을 무조건으로 포용해주고 이해해주는 정서적 안전기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특히, 매슈와 다이애나는 앤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잘 들어주고 감정을 포용해주는 임무를 수행해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연한 사고와 회복 탄력성을 얻게 되었다.     

 

앤이 자신을 놀렸던 길버트를 용서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앤에게 필요한 건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사고였고 이런 생각의 패턴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건 아니었다. 초록 지붕 집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성장하면서 점차 앤은 유연한 사고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무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앤을 지켜보고 말없이 응원해주었던 길버트를 용서하고 친구로 받아들인다. 에이본리라는 작은 마을에 살아서일 수도 있지만 긴 시간 동안 고집 세고 자기 뜻을 절대 꺾지 않는 앤을 묵묵하게 기다려준 길버트는 앤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렇게 진실하고 충직한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나 또한 한결같이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는지도 생각해봤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위해주는 시간을 갖고 싶다. 











Q. 서로 오해가 있었는데 나중에 풀린 경험이 있나요?




앤의 따뜻한 한마디가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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