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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07. 2023

인생의 베이스 캠프

Chapter 20.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세핀 할머니의 초대로 샬롯타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앤. 하지만 길었던 나흘의 시간 중에서 앤에게 있어 가장 좋았던 시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년 시절 내내 자신의 집 없이, 남의집 더부살이를 해야했던 앤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간이 무척이나 소중했을 것이다.


앤과 다이애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처음 샬롯타운으로 출발할 때보다 더 즐거웠다. 앤에게 있어 조세핀 할머니의 환대와 화려한 샬롯타운에서의 생활보다 더 좋았던 건 나를 기다리는 집,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앤이 통나무 다리를 건너자 초록색 지붕집의 부엌에서 깜빡이는 불빛과 은은한 난롯불이 보였다. 앤은 언덕을 달려 올라가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부엌에서 앤을 반기는 것은 뜨개질하던 마릴라와 치킨요리였다.


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릴라와 매슈에게 나흘 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려주는 행복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정말 근사했고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었어요.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즐거웠어요. 이 일은 제 평생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초록지붕집 유적지(Green Gables Heritage Place)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이라크 파병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다. 거기서 부상당한 한 어린 군인이 치료를 받고 다시 이라크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그런 군인을 바라보며 주인공은 의아해한다. 위험하고 열악한 곳, 그리고 다치기까지했는데 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일까?


고아였던 그 군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에 가야 가족이 있어요."


미국에서는 자기 가족이 없었던 군인. 하지만 이라크에 가면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가족이 되었다. 이라크에 머물 때만큼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는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부상으로 미국으로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기 바쁘다. 자신의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고, 친구가 있다. 누구 사람이 없이 서로 밖에 없는 공간에서 비로소 그 어린 군인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이라크에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군인을 보며 꼭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대체가족이 필요했다. 하지만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늘 말없이 교실 한구석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어울릴만한 또래집단이 없는 시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늘 대가족들로 북적였던 외가가,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교회 청소년부가 나의 대체 가족이 되어주었다. 외삼촌들은 아빠가 되어주었고, 교회학교의 젊은 여선생님들은 엄마가 되어주었다. 잘못된 점은 가르쳐주고, 함께 음식을 먹고, 신나게 놀았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의지할 수 있는 대체가족이 없었을 때였다. 왜냐하면 나의 원가정은 미치도록 불안정하고 언제 해산될지 모를만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의지하고 개딜수록 나는 더 힘들어졌고 고립되어갔다.


나는 대체가족을 찾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에 맞는 또래를 만나도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청소년기와 다르게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기껏 만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회사에서 대체가족을 찾으려 애쓰기도 했고, 결혼해서는 시댁에서 따뜻한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섣부르게 마음을 열었다가 다치기도 수차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학창 시절에 만나는 우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마음을 열어야하고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서툴렀고, 계산이 약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이라크 파병 병사들처럼 고립되어있지 않았고, 서로 외에는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마다 자신의 연인이 있고,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고, 형제가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앤이 초록색 지붕집으로 돌아가는 이 장면이 참 감동적이다. 따뜻하게 앤을 기다리는 마릴라와 매슈가 있는 집 말이다.


인생이 히말라야를 오르는 고행길이라면, 집은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이 베이스캠프가 따뜻하고 든든해야 대원들은 탐험을 떠날 수 있다. 다치면 쉬어가기도 하고, 놀라운 성과를 이루면 모여서 축하도 해주는 그런 베이스캠프 말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 부부는 너무 많은 힘든 일을 겪었다.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어른들이 없이 제 잘난 맛에 세상을 다 아는듯양 굴었던 20대의 남녀가 결혼했다. 겪지 않아도 될 시행착오를 겪었고, 무언가 깨달을 때즈음에는 또래 부부에 비해 이만큼 인생의 속도가 뒤로 밀려나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만든 가족이라는 베이스 캠프를 지켜내려고 애썼다. 처음에 가지고 있던 재료가 부실했고, 모진 풍파가 몰아쳤지만 우리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꿈꾸었던 가족을 비로소 얻었기 때문이다.







Q. 내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베이스 캠프를 지키기 위한 나만의 노력은?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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