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는 오픈 준비 중
"나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싶어."
"게스트 하우스?"
미주는 평소와 같이 남편 루이, 딸 샬럿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미주의 갑작스러운 꿈 발표는 파리 14구의 외곽 지역에 있는 조용한 아파트 부엌에서 스튜를 먹던 루이와 샬럿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응. 평범한 게스트 하우스보다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한인 민박이면 좋겠어."
"민박?"
"응. 게스트 하우스랑 비슷한데. 민박은 아침밥도 차려주고, 좀더 집같은 분위기를 주는 곳이지."
"나 알아, 엄마! 우리 몇 번 갔었잖아. 한국 게스트 하우스에 가면 아침에 밥, 국, 김치를 줘서 엄마가 좋아했어. 맞지?"
스튜에 바게트 빵을 찍어 오물거리던 샬롯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큰 소리로 알은체를 했다. 프랑스인인 루이와 결혼하면서, 미주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다. 샬롯이 조금 크면서부터 세 식구는 근처 유럽으로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경비를 아끼기 위해 호텔보다는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몇 번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도 이용한 적이 있었는데 샬럿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 비쥬. 거기 다 불법이었잖아. 위치도 미리 안 알려줘서 한 번은 찾아가는데 얼마나 고생했었다고. 대부분 매트리스도 별로였어. 딱 하나, 아침에 시리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온다는 점만 좋았지만, 나랑 샬럿은 매운 음식을 못먹어서 별 의미도 없었다고."
루이는 미주를 애칭으로 비쥬(bisou, 볼키스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한인 민박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손사레부터 쳤다.
"신분 문제가 있는 한인들이 불법으로 운영한 게 대부분이긴 했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합법으로 운영할 수 있잖아?"
"우리?"
"물론, 내가 운영해도 좋지만 알다시피 자본금이 없잖아. 프랑스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각종 서류나 세금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당신이 투자금을 대고, 내가 일을 하는거야. 어때?"
프랑스에 와서 산지 9년이 흘렀지만, 간단한 일상 대화정도를 구사하는 미주가 프랑스어로 관공서 업무를 처리하기는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이제 샬롯도 많이 컸고, 나도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버겁지 않아?"
"그래서 그런거야. 샬롯은 이제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프랑스어로 놀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이 더 좋고 편하지. 자기 직장에서도 잘 자리잡고 일하고 있으니 안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해볼 수 있는 타이밍이지. 어때?"
"하지만 아침마다 우유에 시리얼 정도나 주면 모를까. 한국 음식은 손도 많이가고 번거롭다고. 더군다나 한국 손님과 소통해야한다는 건 시차 차이도 감안해야한다는거야. 그걸 할 수 있겠어?"
"다 방법이 있을거야.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꽤 많은 게스트 하우스를 다녀봤잖아. 그 과정에서 많은 경험도 쌓았다고."
확신에 찬 미주의 말에 루이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루이라고 언젠가 자신만의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싶다는 미주의 꿈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살면서 세 식구는 자주 여행을 다녔었다. 저가 항공사나 기차를 이용해 국경을 넘어 2박이나 3박 정도 짧은 일정으로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다녀온 것이다.
미주는 여행지에서보다 게스트 하우스에 더 많은 호기심을 가졌고, 구석구석 사진을 찍었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는 스탭이나 주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젠가 미주네 민박집을 열게 되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곤 했었다.
막연하게 샬롯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자신이 은퇴하고 난 이후에나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시기가 너무 빨리 와서 루이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미주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면 본인이 도와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결혼하면서 아무 연고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살며 어린 샬롯을 낳고 키운 미주였다.
이렇다할 경력도 없었으니 자신만의 일을 하고 싶을 것 같았다. 집에만 있다보니 프랑스에 온지 9년이나 되었지만, 미주는 프랑스어가 서투니 한국 여행객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돈을 벌지 못하겠지만 한국을 그리워하며 혼자 밤에 한국 드라마를 보다 잠드는 미주에게는 돈보다 더 필요한 것을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좋아. 하지만 무작정 시작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투자금만 날릴 수는 없어. 당신이 부동산 앱으로 매물을 확인해봐. 서두르면 안되고 제일 좋은 매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거야. 알았지?"
"고마워!"
미주는 두 손을 맞잡으며 기뻐했다. 루이가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루이가 함께 하겠다며 승낙을 해주었다.
딸인 샬롯은 이제 엄마를 예전처럼 찾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미주의 프랑스어 수준을 본다면 점점 커가는 딸과의 깊은 대화에 언젠가 한계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마음껏 한국어로 수다도 떨고, 한국 음식도 먹고 싶어! 무엇보다도 내 일을 하고 싶어...!'
점점 딸에게서 엄마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면서 언젠가 외국에서 한인 민박집을 운영하겠다는 미주의 꿈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가족 여행으로 여러 게스트 하우스를 방문할 때마다 미주는 유심히 그 시스템을 지켜보았고, 인기있는 곳과 아닌 곳의 차이점을 연구하고, 부족한 부분을 나라면 어떻게 개선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계속 어릴줄 만 알았던 샬롯이 초등학교(école primaire)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이제는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미주는 루이의 허락이 떨어진 날부터 바로 부동산 앱에 들어가 매일 검색을 했다. 괜찮은 매물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면 샬롯이 학교에 간 사이에 직접 찾아가보기도 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월세인지, 몇 명까지 수용 가능할지, 지하철역에서 가까운지 등을 꼼꼼히 확인해보았다.
'이왕이면 프랑스에 왔다는 감성이 확 드는 공간이면 좋겠어. 무엇보다 우리 집과도 가까워야 하겠지.'
당연한 일이지만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건물은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두 달 정도를 열심히 손품과 발품을 팔며 알아봤던 미주에게 꼭 맞는 곳이 나왔다. 위치도 미주의 집에서 5분 거리였고, 샬롯의 학교와도 가까웠다.
'여기라면 샬롯을 키우면서 민박을 운영할 수 있겠어!'
지하철역까지 15분은 걸어가야하고, 외곽이라 주요 관광지로부터 조금 멀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월세도 예산에 얼추 맞출 수 있었다. 확신이 든 미주는 남편과 함께 다시 한번, 그 집을 찾아갔다.
"어때?"
미주가 찜한 곳은 200년 정도 된 파리의 한 평범한 건물 4층이었다. 파리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건물일 수 있지만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낯선 이들에게는 충분히 이국적인 경험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아주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어 무거운 캐리어는 하나씩 오르고 내리고 할 수 있어 아주 불편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낡은 쇠난간은 고풍스러워보이기까지 했다.
"안을 들어가봐야 알겠지."
루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미주와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 계단을 올라왔다. 평생 파리에서 살아온 루이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건물과 계단일 뿐이었다. 4층 현관에 도착했을 때, 루이는 이미 지쳐보였다. 그는 눈으로 '불편한 만큼 저렴해야한다'는 말을 미주에게 보냈다.
'찰칵.'
전 세입자가 나가서 텅 비어있는 4층은 지금 미주네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약 2배 크기 정도 되어보였다. 큰 방 2개, 별도의 욕실이 딸린 작은 방 1개, 거실, 부엌, 복도로 이루어져있는 공간이었다. 1,2층에 비해 층고가 낮긴 했는데, 예전에는 고층일 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저층과는 층고나 발코니에 차이를 두고 있었다.
"발코니도 괜찮지?"
그래도 거실을 포함해 3개의 작은 발코니가 있었다. 발코니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둔다면 이 곳에서 여행객들이 휴식을 취하며 한적한 파리의 한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부엌도 있을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인덕션은 국 하나와 고기 반찬 하나 정도 요리하기 꼭 알맞았고, 빌트인 세탁기도 있어 장기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울 수 있었다. 커다란 식탁 하나와 몇 개 간의테이블이나 작은 컴퓨터용 책상 정도 놓을 수 있을 거실도 미주의 마음에 꼭 드는 곳이었다.
"어때?"
미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민박집의 투자자이자 각종 잡역을 담당할 루이의 마음에 들어야할텐데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화장실까지 꼼꼼하게 둘러보고 나온 루이는 미주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멋지네. 호스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에어비앤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그래! 딱 미르박 사이즈야."
"큭큭. 민박 사이즈?"
그렇게 미주는 오랫동안 꿈꾸던 자신만의 민박집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