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투어
다음 날 아침, 비쥬네 민박집에 미주와 루이, 샬롯이 도착했다. 주말이었기 때문에 세 식구가 여유롭게 비쥬네 민박집으로 온 것이었다.
"마미(mami)~"
샬롯은 상을 차리느라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자와 기숙에게 달려간다.
"어, 샬롯 왔니? 얼른 앉아라. 루 서방도."
한국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눈치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샬롯과 루이는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고, 좀 쉬시지. 뭘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많이 하기는? 어제 자기 전에 우거지 담가놓고 잤다가 아침에 일어나 무쳤지. 재료가 있으면 다른 것도 만들었을 텐데 일단 이거라도 먹자."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비행기에서 설잠이 들었어서인지 미자는 파리 시간으로 오전 5시 경에 눈이 떠졌다.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부엌으로 나와 한국에서 가져온 뜨거운 믹스 커피를 한 잔 마셨지만 아직 시간은 오전 5시 40분 밖에 되지 않았다.
국거리용 소고기라도 있었으면 미역국이라도 푹 끓였을텐데, 이제 막 오픈한 민박집 냉장고에는 양파 한 알, 고추 하나가 없었다. 미주가 미리 장을 봐오긴 했지만, 우유와 계란, 바나나 같은 간단한 것들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있는 재료로 반찬을 만들어보는 수 밖에. 기자는 남은 사골국물에 물을 조금 더 붓고 우거지를 크게 한 주먹 쥐어 넣어 끓여기 시작했다. 남은 우거지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집된장 약간, 고춧가루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한바퀴 둘러 우거지 무침을 만들었다. 뜨끈뜨끈한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씩 떠서 식탁에 차려놓자 전날보다 더 풍성한 식탁이 완성되었다.
"깍두기는 더 익기전에 먹어야하니까 부지런히 먹어라."
기자는 함께 식탁에 앉는 대신 샬롯이 먹을 계란말이를 만들며 말했다. 다 만들어놓고 보니 아이가 먹을 반찬이 마땅치 않았기에 급하게 후라이팬에 계란을 풀어 부치고 있는 중이었다.
"샬롯, 이 김 먹어봐. 들기름으로 구운거야. 자."
샬롯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미숙은 샬롯 가까이에 김 그릇을 끌어다주었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한식을 먹는 샬롯은 김으로 밥을 싸서 먹었다.
"여기 계란말이도 먹어라. 케찹이 있으면 뿌려줄텐데. 냉장고에 뭐 아무것도 없더라고."
"내가 과일이랑 좀 사놨는데."
"그걸로 반찬을 어떻게 만드니. 에휴. 네가 민박을 운영한다니 큰일이다. 아침마다 밥 차려줘야한다면서."
"그니까 엄마랑 이모랑 왔잖아. 와서 메뉴도 좀 짜주고, 요리 전수도 해주고 가야지."
"야, 이모는 파리가 처음인데. 계속 일만 시키는 거 아니지?"
젓가락질이 서툰 샬롯을 대신해 계란말이를 밥 그릇 위에 올려주던 기숙이 한 마디 했다.
"큭큭. 안그래도 루 서방이 오늘이랑 내일 엄마랑 이모 모시고 시내 관광 간다고 했어. 주말이잖아. 샬롯도 학교에 안가니까 네 사람이 오붓하게 다녀오셔."
"너는?"
"나? 나는 사장인데 민박집을 지켜야지. 아직 정리해야할 것도 좀 있고."
사실 핑계였다. 7년 만에 만난 엄마가 미주는 여전히 불편했기 때문에 주말 만이라도 떨어져있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루이나 샬롯은 한국어라고 해봤자 음식 이름 몇 가지, 호칭 몇 가지, 인삿말 정도만 할 줄 알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겠지만, 엄마의 한국어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100% 이해하는 미주는 어제 잠깐의 시간 만으로도 지쳐있었다. 자식 도리를 하기 위해 모처럼 만든 시간이었지만 머리와 다르게 마음이 따르지 않았다. 그런 미주를 위해 루이가 다시 한 번 나서준 것이었다.
"그래. 이제 막 오픈했는데 미주가 할 게 얼마나 많겠어. 모처럼 혼자 있으라고 하고 우리끼리 갔다오자, 언니."
"그럴까?"
"그래, 엄마. 루서방이 지난 번에 엄마 베르사유 궁전에 못 가보셨다고, 오늘 베르사유 궁전에 가보겠다고 하더라구."
"궁전? 좋지!? 그치, 언니?"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미주는 루이에게 간단히 통역을 해주었고, 루이는 엄지를 척 올리며 기자와 기숙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네 사람의 본격 파리 관광이 시작되었다.
"이거 하나씩 걸라고? 응, 알았어."
루이는 기자와 기숙을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베르사유 궁전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곤 기자와 기숙에게 오디오 가이드 기계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기자와 기숙은 한국어로 루이와 샬롯은 프랑스어로 각자 가이드를 들으며 넓은 베르사유 궁전을 하나씩 둘러보는 계획이었다. 프랑스어나 영어를 못하는 기자와 기숙이 즐겁게 파리를 즐길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루이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마미, 렛츠고~!"
"렛츠고? 그래, 가자가."
그래도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손짓발짓이 총 동원되어 드넓은 베르사유 궁전 내부를 하나씩 구경할 수 있었다. 이미 도면서 바라보았던 베르사유 궁전 건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한 번 놀란 차였지만, 그 내부는 더욱 화려했다. 루이는 샬롯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도 중간중간 기자와 기숙이 제대로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오고 있는 지 체크했다. 덕분에 기자와 기숙은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천장화, 방 구석구석에 세워진 섬세한 예술 작품, 화려한 가구 등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여기가 공주 방이라는거지?"
기숙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가 사용했다는 방은 화려한 꽃무늬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벽지 만큼이나 화려한 침대 옆에는 방의 주인이었을 공주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너무 화려해서 눈이 부실 것 같은 왕비의 침실보다는 적당히 기품이 느껴지고 차분한 공주의 방이 훨씬 마음에 드는 기숙이었다.
이런 방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이렇게 유럽까지 와서 구경하는 것도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은 꽃무늬 침대와 샹들리에, 자신의 얼굴이 잘 나오게 사진을 한 장 찍어 한국에 있는 희철이에게 보냈다.
[이미지 파일.
엄마 베르사유 궁전왔다. 아들과 조카 부부가 수고해준 덕분에 호강하네.]
[다 미주 누나 덕분이죠. 재밌는 시간 보내세요.]
기숙이 없는 조용한 집에서 인강을 듣고 있는 희철은 자꾸만 날라오는 엄마의 사진과 메시지가 귀찮았다. 하지만 기숙이 SNS를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자랑할 곳이 없는 것을 알기에 이모티콘을 하나씩 보내며 적당히 대꾸해줄 뿐이었다.
[이미지 파일.
아들, 엄마 파리 공항에 도착해서 미주 누나 만났다.]
[^^]
[ 이미지 파일.
이제 밥 먹고 프랑스 빵 먹어본다. 너무 달아서 조금만 먹음.]
[^0^]
[ 이미지 파일.
여기가 엄마랑 이모가 묵을 방이.]
[♡.♡]
희철은 지난 대화 내용을 스크롤해서 읽어보았다. 계모임에서 3박 5일로 북경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기숙이 이렇게 멀리 여행을 떠난 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유럽은 처음이니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을 거라는 것까지는 희철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숙은 거의 매 시각마다 빠지지 않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작은 본인 방에 콕 박혀있는 희철이지만 왜인지 실시간으로 파리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웅.'
[이미지 파일.
거울의 방. 정말 화려하지 않니? ]
[☆.☆]
궁전 내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 기숙이 또 사진을 보내왔다. 희철은 인천공항에서 유럽에서 쓸 유심을 수령해 기자와 기숙의 핸드폰에 미리 유심을 교체해주었었다. 혹시라도 급한 일이 생기면 어디라도 편하게 연락하실 수 있도록 데이터까지 넉넉하게 말이다. 하지만 기숙은 넉넉한 데이터를 한국에 있는 희철에게 여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는데 쓰고 있었다.
[너도 같이 오자니까. 고집은.]
[내가 가서 뭐하게. 이모랑 재밌게 있다 오세요.]
기숙은 희철없이 혼자만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지만, 희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유럽여행이야 나중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방학을 이용해 배낭여행으로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으니까. 희철은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유럽을 여행하며 전세계 친구들을 사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인강에 집중했다.
어느 정도 내부를 둘러본 네 사람은 화장실을 찾았다. 내부를 둘러보았으니 이제 외부를 구경하러 밖으로 나갈 타이밍이었다. 3월 초의 파리가 조금 춥긴 하지만, 궁전 내에서 판매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마카롱을 먹으며 정원엣 휴식을 취하기로 한 계획이었다. 화장실에서 먼저 나온 기자는 그 앞에서 기숙이 샬롯을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분이세요?"
그런 기자에게 한 중년 여성이 말을 걸었다.
"네. 여행오셨나봐요."
기자의 대답에 중년 여성이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딱 봐도 한국 사람 같았어요! 저는 저쪽에 있는 아들네 가족이랑 같이 여행왔어요. 어제 런던에서 파리로 왔는데, 말이 좋아 효도관광이지 아주 고행길이네요."
중년 여성은 깃발을 든 가이드 주위로 모여있는 한국 사람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누가 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엄마가 손자와 며느리인 듯 했다. 기자는 은근슬쩍 아들, 며느리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왔다는 것을 자랑하는 낯선 여성이 못마땅했다.
"네. 저도 어제 파리에 도착해서 적응이 안되네요. 저는 딸이 파리에서 살아서 음식이나 좀 해주려고 왔는데, 사위가 한사코 관광을 해야한다고 해서 왔네요."
하지만 그런 도발에 쉽게 주늑들 기자가 아니었다. 때마침 훨칠하게 잘생긴 기자의 사위, 루이가 커피를 들고 오고 있었다.
"어! 저기 오네요, 루 서방 여기야!"
"오, 쟝모륌~ 요기 마카롱, 커피."
"아이고, 고마워라. 샬롯하고 기숙이는 곧 나올거야."
"예스, 예스!"
"여기가 우리 사위. 나만 오면 되는데 미안스럽게 이모까지 불러서 조카 사위 노릇까지 한다고 아주 열심이에요."
"이모까지요?"
중년 여성은 샬롯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기숙의 모습을 보며 처의 이모까지 챙기는 프랑스인 사위의 모습에 놀라는 듯 했다.
"말이 안통해도 얼마나 살갑고 잘해주는지 몰라요."
"좋으시겠어요."
"호호."
"어머니, 이제 출발한대요!"
며느리의 외침에 중년 여성은 곧 기자를 뒤로하고 가이드를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기자는 손자의 손을 잡고 긴 복도를 걸어나가는 중년 여성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얼마나 복이 많으면 아들, 며느리와 유럽 패키지 여행을 왔을까? 알아보니까 유럽을 돌려면 한 사람당 600만원은 있어야 하던데. 에휴,우리 미후는 부모 효도관광을 시켜주는 건 고사하고 장가나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사위 자랑을 하고 나서도 아들 생각에 가슴이 턱 막혔던 기자는 아들 생각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샬롯의 손을 잡고, 사위의 뒤를 따라 베르사유 정원으로 걸어가며 한국에 두고온 근심을 금방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