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손님!?
지난 주말은 기자에게 참 즐거운 이틀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내부 만큼이나 외부 정원이 아름다웠다. 아직 봄이 완전히 오지 않아 꽃이 없는 휑한 정원은 아쉬웠지만,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궁전과 정원을 거니는 일은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관광을 마치고 늦은 오후에는 7년 전, 루이와 둘이 갔던 에펠탑을 다시 찾았다. 샬롯이 태어났을 때에는 여름이라 에펠탑 광장 안에 들어가 잔디밭에 앉아 쉬었었는데, 3월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네 사람은 에펠탑이 잘 보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달디단 크레페를 먹으며 야경을 구경했다.
다음 날은 노스트람 대성당에 갔다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충분히 쉬고는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갔다. 에펠탑과 몽마르트 언덕은 미자가 7년 전, 루이와 함께 방문했던 곳이긴 했지만 기숙은 처음이기 때문에 루이가 미자가 갔었던 곳과 새로운 곳을 적절히 섞어 루트를 준비한 것이었다. 덕분에 기자나 기숙도 즐겁게 파리 시내를 관광할 수 있었다.
사실 기자가 루이와 함께 하는 관광이 좋았던 건 꼭 유명한 관광지에 가서가 아니었다. 지하철 표를 끊는 것부터 길 안내, 적절한 타이밍에 갖는 카페에서의 휴식,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여동생, 손녀와 함께 찍어주는 사진까지 모든 것을 루이에게 오롯이 맡기고 자신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었다.
기자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믿음직함과 듬직함이라는 감정을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방인인 사위에게 만큼은 경험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남동생을 교육시키고, 한량인 남편을 대신해 두 자녀를 키우고, 이제는 서른이 훌쩍 넘은 아들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기자에게는 낯설고도 간절했던 순간이었다.
월요일부터 루이와 샬롯은 일상으로 돌아갔고, 미주와 기자, 기숙은 본격적인 비쥬네 민박집의 조식 메뉴 구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 언니. 가지가 세상에 이렇게나 실하네!"
"쥬키니 호박도 장난 아니다. 다 하나씩 담아보자. 색깔도 예쁘네."
메뉴 구상의 첫 스텝은 마트 방문이었다. 파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저렴하고 맛이 한국과 비슷한 식재료를 찾아 메뉴를 짜야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애들이 가지나 호박을 좋아할까? 우리 희철이만해도 거들떠도 안보거든."
"그런가? 가지는 싫어할 것 같다. 호박은 얇게 채 썰어서 비빔밥도 해먹고, 된장찌개도 해먹고, 호박전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럼 호박만 할까?"
"그래. 당근이랑 양파는 어디든 똑같을테니까 야채도 다 가져가보자고. 카레라이스도 한 번씩 하면 되겠다."
"그거 좋다. 그럼 고기도 좀 볼까?"
기자와 기숙은 파리의 대형 마트에 오자 날아다니듯 종횡무진하며 이것저것 식재료를 담기 시작했다. 재료만 보아도 무엇을 만들지 머릿속으로 아이디어가 샘솟는 모양이었다. 맏딸이었던 기자는 어려서부터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밥을 차리곤 했고, 기숙은 막내딸이긴 했지만 장손 집안으로 시집가 숱한 제사상과 손님상을 차리며 살아왔었다.
그렇게 음식을 했으면 질릴법도 한데 두 사람은 요리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좋은 국산 재료로 정성껏 만든다는 집밥에 대한 자부심은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을 지켜주는 힘이었다.
미주는 커다란 카트를 끌고 그 뒤를 따라다녔다. 이모인 기숙과 식재료에 대해 그리고 음식 메뉴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분주한 엄마를 바라보며 비행기값이 예상보다 많이 들긴 했지만, 이모 덕분에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뱃속에서 태어난 두 사람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자존심이 강해 기어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기자와 다르게 기숙은 자신을 스스럼없이 낮출 줄 알았다. 외로운 기자에게 한참 어린 동생 기숙은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동생이었다. 기숙이 아니었다면 미주는 엄마를 두고 호주로 그리고 파리로 훌쩍 떠나올 생각을 감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언니, 쥬키니는 좀 두껍게 썰어야해."
"이렇게?"
비쥬네 민박집에 도착한 기자와 기숙은 부지런히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주의 요청대로 만들기 쉬우면서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반찬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지 마트에서 산 쥬키니와 한인 마트에서 산 분홍색 소시지를 합해 전으로 부치는 것이 첫 번째 반찬 아이디어였다.
애호박 소시지 부침
장점 : 야채를 싫어하는 사람도 야채를 먹을 수 있다. 재료비가 저렴하다.
주의사항 : 쥬키니 호박을 사용하니 조금 두껍게 썰을 것.
간은 맛소금으로...!
미주는 두 사람이 요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지켜보면서 수첩에 레시피를 정리했다. 두 사람의 요리 솜씨는 뛰어났지만 오직 손맛으로만 만들어지는 탓에 정확한 요리법이나 계량을 적어두어야했기 때문이다. 미주는 아예 핸드폰으로 타이머까지 맞춰놓고 요리까지 걸리는 시간까지 재고 있었다.
'웅.'
그때, 비쥬네 민박집 공식 SNS로 누군가 DM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남자 3명 입실 가능한가요? 1박 하고 싶은데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프로필에 들어가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었다. 아마도 친구들끼리 배낭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네. 가능합니다.]
[저희가 사정이 있어서 혹시 한국 은행으로 계좌이체 할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해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인스타에 보니까 한식 조식을 준다고 하던데 맞나요?]
미자와 미숙이이 차린 아침 식탁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린 것을 본 모양이었다.
[맞아요. 조식 포함 가격이고, 한국 라면(7유로)도 있으니 언제든 드셔도 됩니다.]
[그럼 혹시 지금 가도 되나요? 저희가 급해서요. 한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아요.]
이제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후 3시부터 체크인을 해야하지만 갑작스럽게 한인 민박집을 찾아 연락한 것을 보면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비쥬네 민박지은 리뷰조차 없는 곳이지 않는가!
"1시간 있다 오겠다는 손님들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점심을 조금 있다 차릴까요?"
"손님들? 몇 명이나?"
"남자 3명이요."
"어이구야. 미주 금방 부자 되겠다. 아니, 벌써 손님이 와?"
"손님들한테 점심 먹었냐고 물어봐. 안 먹었으면 같이 먹으면 되지. 깍두기도 많은데. 쉬기 전에 빨리 먹어야하는데 같이 먹으면 좋겠네."
"우리 민박집은 조식만 주는데."
"그렇긴 하지만 엄마랑 이모가 있잖아. 이 기름냄새 풍기면서 어떻게 밥을 안주니."
"알았어."
이미 부엌은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커다란 스튜용 냄비에는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소고기 미역국이 끓고 있었고, 후라이팬에서는 전부치는 냄새가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밥을 안주는 건 예의가 아니지.'
[혹시 점심드셨나요? 안드셨으면 같이 드실래요? 일을 도와주러 엄마와 이모가 오셨어서 지금 미역국과 소시지애호박전, 깍두기로 아주 간단히 차려 먹으려고 했거든요.]
[앗, 정말요? 저희야 너무 좋죠. 저희는 점심이 아니라 아침도 굶었어요.]
"아침도 굶었다고 같이 먹겠다고 하네요."
"그래? 잘되었다."
'웅.'
[아버지께서 깜빡하고 아버지 이름으로 입금하셨다고 하네요. 입금자명은 '김수용'입니다.]
[네. 입금 확인했어요. 조심히 오세요.]
미주는 레시피 정리를 잠시 멈추고, 입금 내역을 확인한 후, 숙박 예악 사이트에 남성 도미토리 룸 3개의 예약을 막아놓았다. 그리고 DM으로 자세한 민박 이용 안내 사항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남성 도미토리로 들어가 방 상태를 확인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바구니에 수건을 넉넉하게 담고 헤어 드라이기를 한 개 넣어 거울 아래에 두었다. 공동 욕실도 한 번 점검했고, 손님들에게 줄 열쇠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진짜 손님을 맞이해도 될 것 같았다. 미주는 긴장되는 마음에 미역국을 저으면서도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