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 예약한 사연
"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이렇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커다란 베낭을 하나씩 메고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3명의 청년이 비쥬네 민박집에 도착했다. 3월의 파리는 아직 쌀쌀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청년들의 몸에는 퀴퀴한 땀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일찍 체크인을 해주고, 약속되지 않은 점심을 제공하고, 결재의 편의까지 봐주긴 했지만 어쨌든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 고마워하는 청년들에게 미주는 손사레를 치며 방부터 안내했다.
"아니에요. 방은 이쪽이니 짐부터 내려놓으세요. 여기는 욕실이에요. 욕실은 공용이지만 다른 손님이 없으니 세 분이서 편하게 이용하시면 되요. 비수기이기도 하지만 오픈한지 얼마 안되서 손님이 없거든요..
여기는 공용공간인 거실 겸 식당이고요. 아, 여기 계신 분들은 제 엄마와 이모세요. 민박집 오픈도 도와줄 겸 와 계세요. 두 분은 저쪽 가족룸과 별도로 딸린 욕실을 쓰실거니 불편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비슷한 나이대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기자와 기숙은 친근하게 청년들을 맞았다. 자주 맡아서 익숙한 냄새인지 그녀들에게는 청년들 몸에서 나는 냄새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얼른 손부터 씻고 와요. 이제 밥이랑 국만 뜨면 되니까."
"그래. 배고플텐데 얼른 먹어요."
세 청년들은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서 간단히 세수와 손을 씻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소고기 미역국, 애호박 소시지 부침, 우거지 무침, 깍두기, 김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반찬은 몇 가지 안되지만 그릇 가득 쌓인 반찬은 가뜩이나 배고픈 청년들의 시장기를 더 돋구었다.
"우와! 정말 오랫만에 보는 한식이에요."
"맞아요. 음...... 8일 만입니다! 중간에 컵라면 한 번 먹은 거 말고 제대로 된 밥 말이에요."
"비행기에서 한식 먹은 이후 처음인가보네. 비행기에서 주는 비빔밥은 맛도 별로던데 말이야."
"하하. 저희도 국내 항공사를 이용했으면 비빔밥이라도 마지막에 먹었을텐데. 돈을 아낀다고 중국 항공사를 이용했거든요."
"느끼한 중국식 고기랑 밥 먹고, 공항에서 20시간 노숙하고 런던에 왔어요. 런던에 도착해서 컵라면 하나씩 끓여먹었는데 정말 꿀맛이었죠."
"세상에... 20시간 노숙이라니."
국 그릇에 밥을 한 술 말아 깍두기를 얹어 먹는 아니, 마시는 청년들의 모습을 기자와 기숙이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갖 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된장에 조물조물 무친 우거지 무침까지 잘 먹는 모습이 기특했다.
기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꼭 아들 미후가 고등학생 때까지는 무척이나 기자의 음식을 잘 먹어주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방에서 하루 종일 지내며 공부를 한답시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 미후는 혼자 라면을 주로 끓여먹었다. 고기나 구워주면 또 모를까.
"돈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죠. 사실 비쥬네 민박집은 저희로서는 호화 숙소고, 오늘 점심은 정말 호화 만찬입니다."
"큭큭. 맞아요. 12인실이나 16인실 같이 제일 저렴한 숙소만 예약하고, 밥은 배낭에 빵과 치즈, 햄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었으니까요. 겨울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유럽을 다 돌려면 어느 정도 고생은 각오해야죠."
"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여행을 온거야?"
비쥬네 민박을 갑자기 찾은 학생들의 이름은 기한, 민율, 수현. 세 사람은 K 대학교 반도체시스템공학과 1학년 학생들이었다. 대학 동기였던 세 사람은 1학년 2학기가 종강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2달 정도 바짝 돈을 모으니 유럽여행을 다녀올만한 경비를 아슬아슬하게 모을 수 있었고, 다함께 휴학을 하고 유럽으로 왔다고 했다.
"다들 빨리 군입대할 생각이거든요. 군대 가기 전에 한번 놀아보자 하고 온거죠."
"맞아요. 복학하면 취업 준비해야하니 바쁠테고, 취업하면 더 바쁠거예요. 반도체 일이란 게 그러니까. 이렇게 유럽을 여유있게 여행할 수 있는 건, 나중에 결혼해서 신혼 여행으로나 오려나 싶어요."
학생들은 금새 밥과 국을 싹싹 배워냈고, 기숙이 일어나 처음 주었던 양만큼 다시 채워주었다. 잘 익은 깍두기도 다시 추가해서 내주니, 세 학생들은 마치 처음 밥을 먹는 것처럼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저희가 너무 많이 먹죠? 사실 어제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콜마르로 갔었어요. 콜마르 호스텔에 체크인 하려고 보니 여권이 없는 거예요."
"기차역에서 소매치리를 당한 거였죠."
파리의 소도시에서 신용카드와 여권을 잃어버린 세 사람은 경찰서에서 도난신고서를 작성한 뒤, 다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왔다고 했다. 갈 곳도 없을 뿐더러 얼마 나지 않은 현금을 아껴야하기에 기차역에서 노숙을 하고, 날이 밝자마자 파리 영사관으로 가서 임시 여권을 신청했다고 했다.
비상금은 차비와 임시 여권 발급 비용으로 거의 다 써버렷지만 임시 여권이 나오는데까지 하루가 더 필요했다. 너무 피곤한데 돈이 없는 상태라 급한대로 검색을 해서 비쥬네 민박집에 DM을 보냈고, 연락을 받은 기한의 아버지께서 숙박비를 입금해주신 것이었다.
그제서야 미주는 상황이 이해되었다. 세 학생들이 바로 입실 가능한 그리고 한국 은행으로 계좌이체해서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비쥬네 민박집을 급하게 찾은 이유를. 비수기라고는 하지만 위치가 좋으면서도 저렴한 곳은 방 구하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아이고, 비상금이 있었다니 다행이야. 외국에서 당황했을 텐데 이렇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참 대단하네."
"하하. 다행히 제가 몇 백 유로는 따로 챙겨서 이 복대에 늘 지니고 다녔거든요."
수현이가 티셔츠를 들어올리며 웃어보였다. 처음에 기한과 민율이는 수현이의 복대를 보며 놀렸지만, 수현이는 꿋꿋하게 복대를 차고 다녔고 위기의 순간 빛을 발한 것이었다.
"그래, 부끄러울게 뭐 있어? 안전이 제일이지. 그래서 남은 여행은 이제 어떻게 하려고?"
"한국에서 미리 기차랑 숙박을 다 예매해서, 물이랑 빵사먹을 돈이랑 박물관 입장료 정도만 있으면 되요. 어지간한건 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해놨으니까요."
"맞아요. 내일 영사관에서 임시 여권을 받으면 다시 콜마르로 갈거예요. 거기서부터 다시 예정대로 여행을 이어가면 되요."
"물론, 콜마르에서 3박을 하려고 했지만 이제 1박하고 스위스로 넘어가야죠."
콜마르는 파리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여행객들이 중간에 쉬어가는 작은 소도시였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름다운 마을 거리가 예쁜 곳이었다. 소매치기 때문에 일정이 어그러진 학생들 이야기에 미주까지 속상해졌다.
"콜마르 참 예쁜 마을인데. 아쉽겠어요."
"아침 일찍 나와서 시내 한 바퀴 돌아보고 바로 스위스로 가면 끝일 것 같아요. 그래도 새벽 기차가 아니라 아침에 잠깐 둘러볼 수는 있네요.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콜마르에서는 코인 빨래방에 가서 밀린 빨래를 하고 좀 쉬어가려고 했었거든요. 런던이랑 파리는 볼게 많아서 쉴 틈이 없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된 거 파리에서 쉬면 되죠 뭐."
"우리 민박에는 세탁기 그냥 쓰시면 되요. 건조기능도 있으니까 편할거예요."
"와,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 오늘 저녁도 아예 여기서 먹어요. 수저 3개만 더 놓으면 되지. 안그래, 언니?"
"그러자. 여기 메뉴 개발하러 온건데 학생들이 먹어보고 얘기해주면 도움도 되겠어."
기자와 기숙은 소매치기를 당했음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학생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점심에 모자라 저녁 식사까지 제안하고 나섰고, 미주 역시 흔쾌히 허락했다. 기자에게는 힘들기는 커녕 오히려 힘이 샘솟을만한 일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먹을 사람이 있어야 만들지.'
기자는 사람들을 불러 솜씨발휘 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하곤 했다. 미주는 함께 한국에 살 때는 엄마는 왜 사서 고생하나 싶어 짜증이 났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자신도 해외로 나오면서 엄마는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잃어나갔다. 먹을 사람이 없어 명절마다 산더미처럼 만들던 만두도, 송편도, 전도 더이상 하지 않는다며 시무룩해하던 기자의 푸념이 생각났다.
오픈 D+3
수입 : 도미토리 3인 x 1박 = 21만원
지출 : 3인 중식대, 3인 석식대
총 수익 : ??
"그리고... 저어, 사장님.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한이는 미주에게 부탁을 한 가지 더 했다. 기한은 환전을 부탁했다. 아무리 돈을 아껴쓴다고 해도 스위스-체코-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를 여행하려면 최소한의 현금은 있어야했다. 기한의 아버지가 미주의 한국 은행에 돈을 입금하면, 미주가 유로로 기한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미주는 은행에 들려 돈을 찾고, 하교하는 샬롯을 봐줄 겸 민박집을 잠시 나갔고 민박집에는 주인없는 다섯 명의 투숙객들만 남았다.
이미 파리 관광을 많이 하기도 했고, 더이상 입을 옷이 없었던 학생들은 민박집에 남아 빨래를 하고, 돌아가며 샤워를 하며 모처럼 한가한 오후 시간을 보냈다. 노트북을 거실로 가지고 나와 앞으로의 일정을 다시 점검하기도 하고, 식탁에 앉아 한국 믹스커피에 프랑스 과자를 먹으며 기자, 기숙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퇴근하는 루이에게 샬롯을 맡기고 미주가 민박집에 돌아왔을 때, 다섯 사람은 무척이나 친해져 있었다.
"얼른 와라. 루서방이랑 샬롯은?"
"둘이 간단히 파스타 먹겠대."
"그래? 그럼 내가 만두를 따로 챙겨줄게. 있다 집에 갈 때 챙겨가서 내일 아침에 루서방이랑 샬롯 삶아줘라. 루서방이 이 엄마가 만든 고기만두를 얼마나 맛있어했니? 매운거 다 빼고 만들었으니까, 알았지?"
기자는 저녁을 먹는 사람들의 수에 맞춰 펄펄 끓는 냄비에 만두를 넣으며 말했다. 이제 만두가 뜨거운 국물 위로 동동 뜨면 기자표 손만두를 먹을 수 있었다.
"세상에... 만두를 했다고?"
"얘들도 할 일이 없다고 해서 같이 만두 좀 빚었지 뭐."
"아니, 손님한테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해?"
"아니에요. 저희가 좋아하서 한 거예요."
어느 새,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접시에 깍두기를 덜고 있는 민율이가 대답했다. 기자가 만두피를 한 장씩 밀면 세 남학생이 꼼꼼하게 만두를 빚어냈다고 했다. 완성된 만두국을 보니 예쁘지는 않지만 터지지 않게 야무지게 빚어진 큼직한 만두 4알이 들어있었다.
"얘네 얘기 듣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제 스물 한 살 되었다는데 너무 대단하지 않니? 저녁마다 자기들끼리 호스텔에서 파스타를 끓여먹었대. 그럼 돈 만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단다."
"하하. 제일 싼게 파스타 면하고 소스더라구요. 거의 저녁에 저희 셋이서 8인분씩 끓여먹었어요. 한 번은 소세지를 넣어서 사치를 부렸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하하."
"그럼, 여행 끝나고 한국 가면 다들 군대가는거야?"
"빨리 갔다와야죠. 특히, 저희 셋은 모두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와서요."
"아, 셋다 재수를 한거야?"
"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셋이 친해진 것도 있는 것 같구요. 하하."
"맞아요. 재수를 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그 고통이 있거든요. 인생의 쓴맛을 안달까요?"
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기숙의 얼굴을 살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숙의 얼굴에는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기숙은 이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연신 국물만 들이켰다.
"근데 정말 만두국 맛있어요. 떡도 너무 쫄깃하구요."
기자가 직접 방앗간에서 빼온 가래떡, 들기름으로 구운 김을 부순 고명, 거기에 잘 익은 깍두기까지 더해지니 몇 가지 재료를 넣지 않은 만두국이 맛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내일 아침은 카레라이스랑 계란국 먹자. 내가 한국에서 카레가루까지 다 가져왔거든."
"우와, 너무 좋아요!"
학생들의 연이은 음식 칭찬에 기자의 표정은 무척 환해졌지만, 그 옆에 앉아 국물을 떠먹는 기숙은 여전히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