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는 국물과 함께 흰 떡을 먼저 한 입 먹어보았다. 햇쌀로 만들었다는 떡의 식감이 쫄깃하고 좋았다. 거기에 마침맞게 익은 깍두기를 한 입 더 하면 입안이 상큼해지면서 다음 국물이 땡겼다. 그렇게 정신없이 먹다보니 어느덧 만두국을 한그릇 뚝딱 끝낸 미주였다.
"너무 맛있어요. 잘 먹었어요."
미주는 식탁에서 일어서 그릇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설거지할 준비를 했다. 기자와 기숙이 저녁식사를 준비했으니 설거지라도 해야 했다.
"사장님,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런 미주의 손에서 수현이 고무장갑을 가져갔다.
"맞아요. 원래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손님들이 설거지하거든요. 제주도 여행갔을 때도 그렇게 했어요."
"아, 그래요?"
"네. 수현이가 아까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설거지하는거니까 걱정마세요."
미주는 그래도 되나 싶었지만 수현이가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하는 바람에 걸리적거리지 않기 위해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저녁까지 얻어먹고 너무 감사해요, 사장님."
"여기서 잘 쉰 덕분에 남은 일정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휴. 여기서 만두 빚고 엄마랑 이모 말동무 해주셨으면 쉰 것도 아니었을텐데요."
기자의 성격을 잘 아는 미주는 분명 기자가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학생들이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빨래도 해야했고요. 잠깐 낮잠도 자며 잘 쉬었어요."
설거지를 하던 수현이 미주를 안심시켰지만, 역시 미주의 우려가 아주 빗나간 건 아니었다.
"어머, 얘는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러니? 이거나 다들 한 잔씩 해. 소화시키는데는 매실이 최고야. 내가 한국에서 직접 담근 매실액이니까 몸에 좋은거야. 콜라 같은거 마시지 말고 이런 걸 마셔야 해."
기자는 미주가 엉뚱한 소리를 할까봐 얼른 얼음을 넣어 준비하고 있던 매실차를 한 잔씩 건넸다. 미주는 기자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세 분은 다른 숙소에도 있었을텐데요. 제가 처음이라. 혹시 우리 민박집에 개선해야할 점이나 뭐 의견 같은거 있어요? 지금 비수기 때 미리 준비를 해놔야 성수기에 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글쎄요. 이런 조식을 주신다면 장사가 안될리가 없지 않을까요?"
"맞아요. 조식을 주는데도 가격이 일반 호스텔과 비슷하잖아요. 물론, 위치가 약간 관광지에서 멀긴 하지만 어차피 지하철 타고 다녀야하니 그 정도 차이는 별로 신경 안쓸거예요."
기한과 수현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잠깐 낮잠을 잔다고 누워본 비쥬네 민박집의 침대 매트리스는 편안했고, 욕실이야 순서를 정해 씻으면 그만이었다. 호스텔에서 1인당 1장씩만 제공되던 얇은 수건만 쓰다가, 비쥬네 민박집에서는 도톰하고 보송보송한 수건을 마음껏 쓰니 그 또한 만족스러웠다.
"저어. 한인 민박에서는 매일은 아니고 저녁에 이벤트를 하는 곳이 많은 것 같아요."
부족한 점은 없었지만 민율이 다른 배낭 여행자들을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희가 루브르 박물관 가이드 투어를 하면서 다른 배낭 여행자들을 만났거든요. 유럽에 있는 한인 민박에서는 저녁에 주인이 떡볶이나 김치전 같은 요리를 간단히 해주어 맥주를 마시는 파티를 하거나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끼리 친해져서 남은 일정도 같이 여행하고 한다고 해요. 비쥬네 민박집에서도 그런 걸 해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미주 또한 유럽 여행을 하며 손님들을 위해 와인 파티나 떡볶이 파티를 하는 민박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물론, 루이의 한국어가 서툴기도 하고 샬롯을 재워야하기도 해서 참가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미주는 파티를 진행할 자신은 없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분위기를 띄우라니... 그건 미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 사장님께서는 성격이 차분하고 꼼꼼하시니 파티보다는 <야경투어>를 해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야경투어를 하는 곳도 있더라구요."
"야경투어요?"
"네. 한 세군데 관광지를 해가 지고 나서 돌아보는 거예요. 한 1시간 반 정도요? 들어갈 수가 없으니 입장료는 안들고, 지하철 비만 있으면 되죠. 배낭 여행자들 중, 비싸서 가이드 투어를 안하는 사람도 있으니 겸사겸사 설명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구요. 처음 도시에 도착한 사람은 야경 투어 한 번 돌고 나서 다음 날, 혼자 다니기도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익숙하지않으니까요."
"맞아요. 여성끼리 온 경우 아무래도 밤에 돌아다니기 무서우니 야경투어에 껴서 다니려는 분도 계시구요. 아니면 그냥 정말 밤에 할 일이 없어서 사람들이랑 어울리려고 다니기도 하구요."
야경투어라... 파리의 야경은 참 아름다운 곳이 많다. 루브르 박불관도 밤에 가보면 아름답고, 에펠탑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여럿이 밤에 안전하게 숙소에서 출발해 숙소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파티로 분위기를 띄우는 건 자신없었지만, 지금까지 9년 동안 살아온 파리의 구석구석을 안내하고 역사를 설명하는 일은 자신있었다.
"괜찮을 것 같아요. 다같이 움직이니 안전하기도 하구요. 혹시 남성 투숙객이 없는 날에는 남편에게 함께 동행해달라고 하면 안심될 거예요."
미주는 이제는 해가 져 캄캄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은 딱 지금 쯤이 좋겠어요. 관광 일정을 마치고 라면을 끓여먹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면 이 시간대가 될 것 같아요. 관광지로 가는 지하철도 붐비지 않을테구요."
"그럼, 우리 같이 야경투어 루트를 짜서 움직여볼까요?"
기한이가 눈을 반짝이며 의견을 냈다.
"맞아요. 저희가 오늘 쉬려고 했지만 하루종일 민박집에만 있었거든요.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사장님~ 같이 나갔다 와요. 네?"
"지, 지금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미주는 잠시 망설였다.
"우리가 다같이 가면 대학생 배낭 여행자들과 가족 손님들까지 의견을 들어보고 루트를 정할 수 있잖아요. 안그래요?"
기한은 기자와 기숙을 바라보며 물어봤다. 다같이 나가자는 신호였다.
"그, 그러자, 얘. 나나 기숙이는 하루 종일 부엌 싱크대에 매달려서 여기가 한국인지 파리인지 뉴욕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이 도와주겠다는데 같이 움직여보자."
파리까지 왔는데 하루종일 싱크대 앞에 있었다는 기자의 앓는 소리에 미주는 못이기는 척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미주가 루이에게 샬롯과 먼저 자라고 연락을 하는 동안, 기자와 기숙은 얇은 등산 자켓을 걸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기한, 민율, 수현이는 지하철 패스를 한 장씩 챙긴 것으로 외출 준비를 일찌감치 마치고 나왔고 말이다.
"역시 에펠탑부터 가야겠죠?"
"아니지. 에펠탑을 맨 마지막에 가야 감동이 오지."
"맞아. 루부르 박물관에서 에펠탑 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걸로 마무리하는게 좋겠어."
기현과 민율, 수현은 비쥬네 민박집의 <야경투어> 루트를 만드는데 꽤나 진지했다. 그렇게 노스트람 대성당과 영화의 배경이 된 파리셰익스피어컴퍼니 앞에서 사진을 찍고, 센강을 따라 거닐다가 루브르 박물관과 에펠탑에서 마무리한다는 비쥬네 무료 야경투어 루트가 완성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출처 : pixabay)
미주는 센 강을 따라 움직이는 보트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파리의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렇게 밤에 자유롭게 돌아다녀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육아에 메여 살았었다. 젋은 배낭여행자들과 밤 거리를 걷다보니 9년 전,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머물던 시절이 기억났다. 그때의 미주는 무척이나 젊었었고, 하루종일 카페에서 일하고도 밤이면 다른 워홀러들과 비치에서 맥주를 마셨었다. 비번인 날에는 골든 코스트에서 수영을 하거나 선탠이라도 하며 남아도는 체력을 어찌할 줄 몰랐던 그 시절. 이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잠시 20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 때문에 사람들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가 싶었다.
"이 정도 걸으니까 딱 좋다. 저녁 밥 소화도 되고, 잠도 잘오고 말이야."
기자나 기숙 역시 만족스럽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지난 주말, 루이와 함께 파리 시내를 이곳저곳 누볐지만 말이 통하는 학생들과 다니는 거리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았다. 기숙은 센강을 걷다가 눈에 보이는 아무 젤라또 가게를 가리키며 자신이 살 테니 하나씩 먹자고 했다. 모두 괜찮다고 했지만 기숙은 남편에게 받아온 용돈이 있다며 모두에게 젤라또를 하나씩 사주었다. 며칠 동안, 비쥬네 민박집에서 제공한 프라이빗 파리 시내 투어에 이렇게라도 성의 표시를 하고 싶은 마음을 알기에 미주는 세 학생들의 손에 젤라또를 하나씩 쥐어주고, 자신도 하나를 받아 먹기 시작했다. 미숙은 젤라또를 받자마자 환하게 불켜진 젤라또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한국에 있는 희철에게 보냈다.
[오늘은 야경투어 나왔어. 젤라또 먹고 있어.]
[:p]
"우리 여기서 사진 찍어요!"
수현이가 에펠탑 앞에서 민박집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에펠탑과 6명의 얼굴이 모두 나오기 위해 한동안 우왕좌왕 하며 수십장의 사진을 찍었고, 모두가 잘 나온 사진을 겨우 두 장 건질 수 있었다.
"하하. 잘 나왔어요, 사장님!"
"그렇네요."
이렇게 민박집 사람들끼리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들끼리 서로 교류하는 것도 호텔과 다른 민박의 매력이니까. 유료 야경투어 상품들도 많긴 하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 비쥬네 야경투어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였고, 또는 여러 가이드 상품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였다. 미주는 틈틈히 공부를 더 해서 그 어느 유료 가이드 투어에 뒤지지 않도록 야경투어를 진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이 무료 야경투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한식 조식만큼이나 비쥬네 민박의 인기 요인이 될 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