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손님이 쏜 작은 공
"언니, 이건 꼭 한국 청양고추 같다. 그치?"
"맵지만 크기는 오이고추만큼 크니까 장아찌 만들기에는 더 나을 것 같아. 손도 덜가고."
다음 날, 늦은 오후. 비쥬네 민박집 기자와 기숙은 청고추인 피멍 베르(piment vert)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기한과 민율, 수현은 영사관에 들렸다가 콜마르로 이동해야했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체크아웃을 했다. 기자와 기숙이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가는 길을 배웅까지 해준 덕분에 미주는 손님이 있었지만 오후가 되어서야 민박집으로 출근했다. 첫 손님들의 체크아웃을 직접 못해주는 것이 아쉬웠지만 기자와 기숙이 있을 때, 샬롯의 등교를 한 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미주는 피멍 베르를 손질하는 두 사람 옆에서 무를 자르는데 열중했다. 세 사람은 비쥬네 민박집의 든든한 밑반찬이 되어줄 장아찌를 만드는 중이었다. 매번 김치를 담그기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 기자와 기숙이 생각해낸 반찬이었다. 무, 오이, 양파, 피멍 베르를 넣은 간장 장아찌는 손님이 없으면 한 달에 한 번만 만들어주면 되니 바쁜 미주에게 꼭 필요한 메뉴였다.
"이게 깍두기보다 더 쉬운 것 같아."
길쭉하게 무를 자르던 미주가 한 마디 보탰다. 아무리 김치 중에 제일 쉬운 게 깍두기라고 하지만 손님들에게 내어도 괜찮을 만큼 맛있는 깍두기를 담그는 건 영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겉절이나 배추김치 담그려고 해봐라. 너무 힘들어서 안되."
"그건 그래. 겉절이는 또 바로 먹지 않으면 맛이 없으니까 자주해야해서 힘들단 말이야. 깍두기야 여기서 사이다하고 그 쪽파 같이 생긴거 뭐냐."
"오뇽 블랑(oignon blanc, 흰 양파. 줄기가 대파와 맛이 비슷하다.)이요?"
"그래, 그거 넣고 만들면 금방 완성된다. 액젓이야 우리가 가져온거 쓰면 되구. 그보다 더 편한 김치가 어딨다고 그러니."
기자와 기숙에게는 한없이 간단한 요리이지만 미주는 나중에 혼자 만들 자신이 없었다. 결혼한지 9년차가 되었다고 하지만 한식을 늘 먹지 않기에 김치는 한인마트에서 조금씩 사다먹었기 때문에 스스로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는 미주였다.
"자, 미주야 이리와서 이제 간장 좀 끓여봐라. 이모가 말하는 대로 일단 냄비에 재료를 하나씩 부어봐. 기준이 되는 컵이나 대접이 있어야하거든? 작은 냄비도 좋고."
"네."
미주는 기숙이 시키는대로 손잡이 달린 적당한 컵이나 냄비를 찾기 시작했다.
'딩동.'
그때, 미주의 태블릿이 울렸다.
[예약 신청. 24년 7월 15일-18일. 여성 도미토리 4인.]
여름 성수기 예약 신청이었다. 미주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예약 사이트에 접속해 예약을 확정하고, 다시 장아찌 만들기 작업을 이어나갔다. 간장과 식초, 설탕, 물을 같은 비율로 넣은 양념이 냄비에 끓는 동안, 세 사람은 일정한 크기로 자른 야채들을 열탕 소독한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익은 다음 네가 맛을 한 번 보고 너무 매운 맛이 강한지 부족한지를 봐. 그래야 다음 번에 고추를 좀 조절해서 넣을테니까."
준비한 유리병에 야채를 모두 담으니 냄비에 넣은 양념도 펄펄 끓어올랐다. 미주는 냄비에 불을 끄고 국자로 조심히 떠 유리병에 양념을 붓기 시작했다. 아직 완성도 되지 않았지만 아삭아삭한 장아찌를 먹을 생각에 미주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딩동.'
[예약 신청. 24년 8월 1일-4일. 남성 도미토리 1인.]
그때, 다시 미주의 테블릿이 울렸다. 여름 성수기에 비쥬네 민박집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투숙객이었다. 예상치 못한 연이은 예약 알림에 놀랍기도 했지만, 여름 성수기라서 그저 손님이 많은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딩동.'
'딩동.'
'딩동.'
하지만 장아찌를 만들고 깍두기를 만들기 시작할 때도 미주의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번에는 미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웅.'
영사관에서 임시여권을 받기 위해 오전에 서둘러 체크아웃했던 기한이 DM을 보냈다.
[사장님, 저희 영사관에서 여권 잘 받았고, 기차타고 콜마르까지 무사히 잘 도탁했어요. 콜마르 호스텔에서 쉬고 있고, 내일 오전에 스위스로 떠납니다. 사실 저희 셋이 멘탈이 탈탈 털렸었는데, 비쥬네에서 하루 쉰 덕분에 남은 일정도 힘내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해서 인터넷 카페 <유럽유랑자>에 후기를 올렸어요. 도와주신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비쥬네 홍보를 돕고 싶었어요. 그럼, 나중에 신혼여행으로 파리에 온다면 그 때 또 뵙겠습니다.]
미주는 메시지와 함께 기한이 보낸 링크를 클릭해 들어가봤다. 간단한 회원가입을 마치자 기한이 쓴 글을 볼 수 있었다.
제목 : 파리 한인민박 비쥬네에서 급 1박했어요!
파리에서 콜마르에 도착하고 보니 여권과 신용카드가 사라졌더라구요.
(신용카드는 아빠 카드여서 급하게 연락드려 분실 신고했어요.)
경찰서 갔다가 비상금 털어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
영사관에서 임시여권 신청하고...
하루를 파리에서 더 기다려야한다고 해서
정말 급하게 새로 오픈한 비쥬네 민박집에 연락드렸는데
흔쾌히 오라고 하셔서 조금 일찍 체크인 했어요.
사장님께서 환전도 도와주시고
투숙객은 빨래가 무료여서 세 명 묵은 빨래도 하고
돌아가면서 보송보송한 수건에 샤워도 하고
밤에는 사장님이 진행하시는 무료 야경투어에 참여해
하루 늘어난 파리 일정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자랑해야햐할 건 한식이지요.
일찍 체크인해서 가니 점심 시간이라
식사 준비를 다 마치셨다고 이렇게 집밥을 차려주셨구요.
(이미지 1.jpg)
저녁에 빨래 개고 있으니 같이 만두 빚어 먹자고 하셔서
떡만두국 만들어 주셨구요.
(이건 사장님 어머니와 이모님께서 와계셔서
특별히 받은 서비스입니다.
너무 운이 좋았어요.)
(이미지 2. jpg)
조식은 카레라이스, 계란국, 대왕소시지
그리고... 깍두기를 주셨어요!
(이미지 3. jpg)
사장님께서 국제 결혼을 하고
파리에서 초등학생 아이도 키우고 계세요.
불법이 아니라 합법으로 운영되고
갑자기 사라지는 민박집이 아니니
안심하고 예약하세요.
글 아래로는 댓글들이 많이 달려있었다. 미주는 기한의 글을 보고 배낭여행자들이 예약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한인 민박집 예약했다가 갑자기 예약 취소되서 정말 비싼 곳에서 묵었었는데 이런 곳이라니 안심이에요!'
'우와. 정말 운이 좋으셨네요. 밥이 너무 맛있어 보여요.'
'이번 여름 파리는 여기로 예약합니다.'
미주는 기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요. 갑자기 예약이 여러건 들어와서 왜그런가 했더니 기한 학생 덕분이었네요. 남은 일정 무사히 보내고 기회가 닿으면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