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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Oct 07. 2024

중동에서 온 손님

이제는 반가워할 수 있는 손님

기자와 기숙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미주는 예정대로 혼자 민박집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비수기이기도 하고 오픈한지 얼마 안되서 여름 성수기까지는 손가락을 빨고 지내야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며 시작했었는데, 생각보다 꾸준히 손님이 있어주었다.


거기에 기한이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려준 덕분에 일주일에 최소 한 팀 정도는 도미토리를 이용하는 배낭 여행객들이 왔다. 만실인 날은 없었지만 월세를 내기에는 충분했고, 아직 일이 익숙치 않은 미주가 혼자 상대하기에 적당했다. 일주일에 한 번, 침대 시트를 걷어 새 걸로 갈아주고, 방을 청소했다. 비수기에는 야경 투어를 주 1회 진행했는데, 그때그때 묵는 팀과 조율하여 진행했다. 여자들끼리만 온 여행객들의 경우, 루이와 샬롯까지 동행하곤 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손님은 1달 동안 가족룸에 장기 예약한 신혼부부였다. 갑작스럽게 파리에서 포닥(Post doctoral research associate, 박사후 연구원의 줄임말) 과정을 밟게 되어 온 부부는 한국에서 부친 신혼 살림이 도착하고 새 아파트를 계약할 때까지 한 달 동안 비쥬네 민박집에서 묵기로 했다. 남편인 진규는 오전에 연구소에 출근해 저녁에야 돌아왔고, 아내인 소라는 그 동안 파리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 아파트를 알아보았다. 주말에는 근처 파리 소도시로 여행을 다녀오니 무척이나 조용한 장기 투숙객이었다.





'웅.'


진규와 소라는 주말을 맞이해 해안절벽을 보겠다며 아침 일찍 에트르타(Etretat)로 향했고, 4일 동안 묵었던 여학생들 한 팀은 스위스로 간다며 조식을 먹고 바로 체크아웃했다. 민박집 정리를 서둘러 끝낸 미주는 부지런히 집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민박집이 한가한 틈을 타 오늘은 모처럼 샬롯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때, 미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언니~ 나 다음 달 초에 파리 비행 나왔어! 5월 7일-9일 일정이야.]


함께 취업 스터디에서 취업 준비를 했었던 진경이었다.


[이번에는 볼 수 있는거야?]


중동의 한 항공사에 승무원으로 취업한 진경이는 파리로 비행을 올 때마다 연락을 했다. 물론, 너무 피곤해 파리에서는 호텔에서 잠만 자다가 바로 중동으로 돌아가야하는 일정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서 결국 만나지 못하고 서로 생사확인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이 좋은 날에는 함께 파리 시내를 거닐며 커피도 마시고 관광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응! 호텔에 도착하면 오후 1시 정도 되니까 씻고 한 두세시쯤 만날 수 있어~ 올때 갈때 하프 로드(Half Load, 승객이 반만 탑승해 업무 강도가 낮은 비행)거든! 다음 날, 조식먹고 바로 공항 가야하지만 반나절은 놀 수 있음! 손님 없으면 민박집에 가도 돼?]


[그래. 한 번 와봐. 지하철만 타면 올 수 있어. 내가 민박 일정 확인해보고 바로 연락줄게~]


[응!]





진경이는 미주보다 6살이나 어렸지만 이상하게 잘 통하는 면이 많은 동생이었다. 영어 면접 스터디 그룹에서 만난 두 사람은 거의 매일 같이 붙어다녔다. 진경이와 미주는 모두 외국 항공사 승무원 면접을 준비하는 준비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스터디 그룹 모임이 없는 날에도 두 사람은 카페에서 만나 영어로 열심히 수다를 떨며 준비를 했었다. 함께 자료를 공유했고, 면접일이 다가오면 서로 헤어와 의상을 봐주며 준비에 열심이었다.


- 언니, 나 최종면접 붙었어! 나만 되서 어떡해.


그렇게 함께 준비한지 9개월이 흘렀을 때, 진경이가 중동의 한 항공사에 승무원으로 합격했다. 미주는 한국 대행사에서 진행하는 1차 면접에서도 번번히 낙방하던 터였다. 이미 미주는 대학 졸업반부터 국내 항공사 승무원으로 면접을 여러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에도 매번 1차에서 탈락했었다.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여러 실습까지 거쳤지만 국내 항공사의 승무원의 문턱이 너무 높았다. 한 대기업의 계약직 비서로 일하면서 연차를 사용해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낙방에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미주의 나이도 어느덧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아무리 나이제한이 없다고 하지만 신입으로 입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미주는 고등학생부터 품고 있었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외국 항공사에서도 한국인 승무원을 채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미주는 외국 항공사로 눈을 돌렸다. 외국 항공사는 나이나 외모에 대한 기준이 한국 항공사에 비해 덜 엄격했다. 문제는 영어로 교육을 받고 업무를 해야하다보니 높은 수준의 영어 실력이 요구되었다. 회사를 다니며 전화 영어도 꾸준히 해보았지만 실력이 영 늘지 못했다.


어학연수를 갈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던 미주는 오전에는 영어 스터디 그룹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동네 보습학원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수영을 하며 최종 합격 후 있을 수영 테스트에 대비했다. 부모님게 손을 벌릴 수 없었기에 100만원이 조금 넘는 학원 강사 월급으로 면접 때마다 샵에 들려 화장을 받았고, 매일 식비와 차비를 해결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준비했다고 자신했던 몇 년의 시간이었다. 그랬기에 미주는 더이상 같은 방식으로는 답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아니야. 넌 이번에 될 줄 알았어. 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안되겠어.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도 내년까지라서 아예 호주로 가려고.


- 호주?


- 응. 호주에서 일하면서 오픈데이(Open Day, 누구나 이력서만 가지고 면접을 보는 채용 방식)에 가보려고. 아무래도 한국에서 대행사들이 진행하는 1차 면접을 통과 못하는 걸 보니 나이가 문제인 것 같아. 차라리 호주에서 직접 항공사 면접관들을 바로 만나야겠어. 호주에서 영어 실력도 조금 더 쌓으려고.


- 그래, 해외 경험이 있으면 더 플러스가 될거야. 내가 누구보다도 언니를 잘 알잖아. 영어도 얼마나 잘해. 분명히 호주에서는 합격할테니까 곧 중동에서 만나자. 내가 먼저 가서 언니 맞을 준비하고 있을게. 몸만 오셔.


- 하하. 고마워.


출처 : PIXABAY


그렇게 매일 같이 붙어다니던 진경과 미주는 각자의 길로 갔다. 진경은 카타르라는 낯선 나라로 설레임을 안고 떠났고, 미주는 호주라는 낯선 나라로 불안을 안고 떠났다.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며 연락이 뜸했던 두 사람은 미주가 파리에서 살게 되면서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카타르와 프랑스는 먼 거리의 나라였지만,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진경은 자주 프랑스에 비행으로 왔고, 올 때마다 만나지는 못해도 꼭 연락을 했었다.


파리에 마련한 작은 방 2개짜리 신혼집에 놀러온 친구도 진경이 유일했고, 샬롯이 태어났을 때 아기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 친구도 진경이 유일했다. 1년에 두 번 정도 만날 뿐이지만 각자 타지 생활을 하다보니 만날 때마다 무척 반가운 두 사람이었다.


물론, 미주는 진경이가 처음부터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정리하고 말도 안통하는 파리에 막 왔을 때는 만나는 것이 힘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10년을 꿈꾸었던 승무원이라는 꿈을 강제로 포기하게 되어서인지, 임신 호르몬 때문인지, 고향이 그리워서인지 모르겠지만 문득문득 우울함이 밀려왔던 시간이었다.


친구 하나 없는 곳에 진경이가 비행으로 파리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기업에 다니며 자유롭게 전 세계를 누비는 진경이를 만날 때마다 부럽다 못해 질투가 몹시 났다. 월급을 모아 착실하게 적금을 붓고, 항공사 할인 티켓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고,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진경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얼굴로는 웃고 있지만 속에서는 우울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왜 자신에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는지 닿을 듯 하다 결국 끝내 닿지 못한 꿈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질투가 옅어졌다. 루이는 회사에서 자리를 잘 잡아나갔고, 샬롯은 예쁘고 똑똑하게 커나갔다. 미주의 프랑스어 공부도 순탄하게 진행되어 점차 파리에서의 삶이 익숙해져갔다.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기에는 소소한 행복으로 가득한 일상이었다. 샬롯이 자라는 모습을 눈에 담고, 휴가에는 승무원들처럼 고급 호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 식사를 하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저렴한 예산 안에서 유럽의 한 도시씩 여행을 다녔다. 화려한 커리어를 쌓지는 못했지만 가족과의 행복을 많이 적립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그저 진경이를 만나는 것이 즐겁기만 한 미주였다.




다행히 진경이 오겠다고 하는 날은 진규 소라 부부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평일이니 급하게 누가 예약할 일도 없을테고, 함께 느긋하게 커피도 마시고 민박집 구경도 시켜주다가 일찌감치 헤어지면 되지 싶었다.


[진경아, 그 날 민박집에는 손님이 2명만 있는데 장기투숙객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거든. 오면 맛있는 밥 해줄게. 엄마랑 이모가 다녀가시면서 김장김치 주고 가셨는데 김치찌개 끓여줄게. 와서 밥도 먹고 민박집 구경도 하고 하자.]


[우와, 정말? 집밥 오랫만에 먹겠다. 그러면 내가 파리 비행가기 전에 한번 더 연락할게!]


[응!]


미주는 진경과의 연락을 마치고 기숙이 아껴서 사용하라는 포기김치를 열어보았다. 신김치 냄새가 확 올라오면서 군침이 돌았다. 신김치에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여 김치찌개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당면으로 잡채도 만들고, 냉동실 한 쪽에 보관한 무말랭이도 조물조물 무쳐서 정갈하게 집밥 한 번 차려줘야지 생각했다. 한참 어린 동생을 만날 때마다 못난 마음에 질투를 느끼며 불편해했던 일에 사과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면서 일정이 꼬여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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