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쥬네를 찾은 첫 번째 손님?
"여기야, 여기!"
미주는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팔을 위로 흔들었다. 커다란 캐리어에 모자라 박스테이프로 둘둘 감은 커다란 종이 상자까지 카트에 실고 입국장을 나오는 두 중년 여자들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에는 대부분 한국인 승객들이 타고 있었지만, 많은 인파 속에서 강렬한 핫핑크와 형광 오렌지 색의 등산복을 입은 두 할머니를 차자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쥬네의 첫 손님들에게는 특별히 공항 픽업 서비스까지 제공되었다.
"어, 미주야!"
예약 사이트를 오픈한 날, 첫 손님이 예약을 마쳤고 그로부터 3일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비쥬네의 첫 예약자 [박기자] 씨는 미주의 친정 엄마였다. 예약 사이트에 후기도 남길 겸, 손님들에게 제공될 조식에 대한 조언도 얻을 겸 초대된 손님이었다.
"얘, 너무 오랫만이다! 잘 지냈지?"
친정 엄마와 함께 파리행에 동행한 이는 이모인 박기숙. 친정 엄마만 부를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2명의 손님을 받게 되었다.
"이모, 엄마! 고생 많았어! 힘들었지?"
"야, 말도 말아라. 14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있으려니 죽겠다. 기내식은 어찌나 느끼한지 소화도 안되고. 얼른 가자. 가서 사골국이나 끓여서 밥 먹어야지 안되겠다."
"그래, 네 엄마 말이 맞다. 우리집 김장 김치도 몇 포기 가져왔으니까 그거랑 밥 좀 먹자."
"김장 김치까지 가져왔어?"
"그래 얘. 어디 김장 김치 뿐이다니? 너 여기서는 구경도 못하는 이모 시댁에서 직접 담가온 고추장부터 매실 짱아찌까지 다 있어. 이모가 비행기 값 제대로 한거다?"
"조카 딸이 이모 비행기 한 번 태워줘야지. 얼른 택시타러 가자."
"호호. 네 말이 맞다.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는 말 딱 맞나보다. 조카 딸 덕분에 나까지 호강하네."
기숙은 미자의 파리방문에 자신까지 끼게 되어 조금 미안한 모양이었다. 낯선 공항에서 몇 년 만에 보는 조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온 말이 비행기 값이었으니까.
"엄마, 2명으로 예약했어?"
비쥬네 민박집의 첫 손님으로 친정 엄마인 기자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샬롯의 돌잔치를 한국에서 한 후로 딸인 미주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 동안은 아이까지 있어 집이 좁고 불편하다는 이유, 한국까지 갈 비행기값이 비싸다는 이유 등으로 만남을 피해왔었다. 하지만 민박을 시작하면서 당분간 빈 방이 많으니 엄마 얼굴도 볼 겸, 민박 조식 운영에 대한 조언도 들을 겸, 미주가 큰 마음을 먹고 미자를 파리로 초대한 것이었다.
"얘, 내가 혼자 가면 뭐하니? 너는 애보고 민박 운영한다고 바쁠텐데."
"바쁘긴. 오늘 예약 사이트 오픈했는데 당장 내일부터 오겠다는 사람이 어디있어? 5월부터 손님들이 늘겠지. 그 전까지는 아무도 없을테니까 걱정 마."
"됐고. 기숙이 이모가 시간 된다고 하니까 우리 둘이 같이 갈거야."
"갑자기?"
"네말대로 3월 초에는 파리에 누구 안온다며? 비행기도 자리 남는게 있을텐데, 이모 것까지 예약해줘."
"비행기표가 무슨 지하철인줄 아나봐. 갑자기 두 사람이 같이 올 수 있는 자리를 뚝딱 내놓으라니?"
"여권하고는 다 있다고 하니까 얼른 표 사서 희철이한테 연락해라. 너네 민박집도 희철이가 예약했으니까 걔한테 돈 돌려주면 된다. 나는 이제 미숙이네 가서 너네 집 들고갈 깨소금도 볶아야하고, 미숫가루도 만들어야하고, 참기름도 좀 짜야하고 바쁘다. 알았지?"
"여보세요?"
'뚝.'
기자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1시간 반 뒤, 기자가 기숙이 네에 잘 도착했는지 기숙의 아들인 희철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누나, 이거 엄마 여권이야. 큰 이모가 보내라고 해서.]
작년에 군대에서 재대했다는 희철이가 바쁜 이모를 대신해 필요한 서류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준 것이었다.
[응. 잠깐만 기다려봐.]
미주는 노트북에 접속해 바로 엄마 미자가 타고 오기로 한 비행기에 빈 자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추운 3월 초에 파리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지 자리가 많이 있었다. 기숙의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두 사람의 좌석을 사전 지정하여 붙여놓으니 벌써 1시간이 훌쩍 넘게 시간이 흘렀다.
[자, 여기 예약했는데 확인해봐. 당일에 네가 공항으로 모시고 올거니? 누가 도와줘야할텐데.]
[응. 내가 엄마랑 이모 모시고 인천 공항으로 갈게.]
[그래, 고맙다. 숙박비 결재한건 내가 지금 입금해줄게. 나중에 후기 좀 네가 잘 써줘. 엄마나 이모가 남기시기 힘드실 것 같아서. 3월에 개강해서 바쁠텐데 수고하고.]
원래는 남동생 미후가 숙박 예약 사이트를 통해 비쥬네 민박집에 예약을 하면, 미주가 숙박비를 돌려주려고 했었다. 너무 이용 후기가 없으면 사람들이 선뜻 예약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겸사겸사 후기도 남길 요량으로 생각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기자는 아들인 미후에게 이런저런 일을 부탁하기 편치 않았는지, 조카인 희철에게 일을 부탁했고, 부탁만하기 뭐한지 기숙까지 함께 파리에 데리고 가겠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나 한가해서 괜찮으니까 걱정마.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한번 연락할게.]
3월부터 복학해서 대학을 다닐 희철이 시간을 내어준다니 미주는 고맙기만 했다. 희철이가 두 분을 모시고 공항에 와서 체크인만 도와주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모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남동생인 미후에게 부탁해야했었다.
'어휴, 미후한테 부탁하느니 희철이가 낫지.'
친동생인 미후보다는 차라리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어색한 사촌인 희철이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미주였다. 그렇게 비쥬네 민박집은 오픈하기 전부터 2인 인천-파리 왕복티켓 값을 까고 시작하게 되었다.
오픈 D-3
수입 : 가족룸 20만원 x 8박 = 180만원
지출 : 항공권 2인 300만원
가족룸 환불 180만원
플랫폼 수수료 27만원
총 수익 : -327만원
세 사람은 공항에서 택시 한 대를 잡아 막대한 짐을 쑤셔넣고 곧장 민박집으로 왔다. 파리 시내는 벌써 캄캄하기도 했고, 긴 비행으로 피곤했을 두 분을 위한 선택이었다. 미자와 미숙을 먼저 계단으로 올라가게 하고, 혼자 1층에서 작은 엘리베이터에 짐을 하나씩 올려보냈다.
"아이고야, 집 좋다! 미주가 그냥 프랑스에서 성공했네! 이런 넓은 집에서도 다 살고."
짐을 위로 다 올려보낸 미주는 4층으로 올라와 열쇠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는데 처음 들어가보는 유럽의 아파트에 이모 김미숙이 놀라며 두리번 거렸다. 몇 달치 월세만 미리 내고 들어온 집이었지만, 이모는이 집이 최소한 전세는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월세야."
"히익. 월세야? 하이고, 월세 내다가 언제 돈 모은다니?"
"여기는 다 월세야."
"그래도 이 큰 집을 구해서 민박할 생각을 하고, 대단하다."
소파 위에 앉는 대신, 카펫 바닥에 철퍼덕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으며 미숙은 말을 이었다.
"대단하긴. 월세 무서운 줄도 모르는 애지."
잠시 숨을 돌리며 쉬는 편을 택한 미숙과 달리, 미자는 커다란 박스 2개를 들고와 앉았다.
"가위나 칼 어딨냐?"
미주가 카터 칼을 가져다 주자, 미자는 종이 상자를 뜯었다. 종이 상자 안에는 비닐봉지와 랩으로 몇 겹이 둘둘 감싸진 음식물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자는 그 중에서 1.5L 짜리 패트병 하나를 바로 찾아내 미주에게 건넸다.
"매실액이다. 더운데 이걸로 음료나 만들어먹자."
미주는 패트병을 건네받아 부엌으로 갔다. 유리잔 세 개를 꺼내고 생수와 얼음을 채웠다. 그리고 그 안에 진하게 숙성된 매실액을 부어 잘 저어주었다.
"이모."
"어, 그래, 고맙다."
미자와 미숙에게 한 잔씩. 그리고 미주도 한 잔 마셨다.
"이제 살 것 같네."
"그러니까. 비행기 음식은 참 맛이 없어. 그치 언니?"
"비빔밥이 나왔는데 기름이 어찌나 많던지, 먹고 나서 속이 미식거려 혼났다. 밥은 해놨니?"
"응. 넉넉하게 해놨어."
미주는 민박집에서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30인분 밥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끓여라."
그러자 미자는 캐리어 안에서 커다란 플라스틱 통 하나를 꺼냈다. 겉에 둘둘 감겨있는 랩을 벗기고 플라스틱통 뚜껑을 열자, 다시 꽉 묶인 두 번의 비닐봉투가 나왔다. 비닐봉투를 열자 아직 차가운 사골국물이 있었다.
"아주 꽁꽁 얼려가지고 왔는데, 아직 차갑네. 상하지 않았다. 그거 얼른 끓여라. 밤새 핏물 빼고 6시간을 고아낸 진짜 사골이야. 어디 수프 같은 거에 비긴다니? 루 서방이랑 샬롯이랑도 같이 밥먹으러 올꺼지? 얘, 미숙아. 깍두기가 어딨냐?"
"깍두기는 다른 상자에 있나봐. 기다려봐."
미숙은 분주한 미주의 마음을 읽고 몸을 일으켜 다른 상자를 열었다.
"언니, 여기 멸치볶은 것도 있네. 미주야, 이것도 상에 차리고."
"네."
미주는 루이에게 샬롯을 데리고 민박집에 오라는 메시지를 남긴 후, 바로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있는 음식을 그릇에 담기만 하는 덕에 곧 식탁이 채워졌고, 루이와 샬롯이 도착했다.
"쟝모륌~!"
"마미(mami)!"
루이와 샬롯은 미자와 미숙을 번갈아가며 끌어앉고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멀리 떨어져있는 탓에 그리고 미주의 의도대로 몇 번 만나본 적이 없는 장모님이자 할머니였지만, 루이와 샬롯은 무척이나 반갑게 김미자를 맞아주었다.
"어머, 샬롯! 많이 컸네~ 루 서방도 잘 지내고 있었지? 얼른 와서 밥 먹자. 맨날 빵이나 먹고 어찌 살아. 이 할머니가 우리 샬롯 주려고 몸에 좋은 거 많이 가지고 왔어."
미주는 미자의 말을 부지런히 통역하며, 부글부글 끓는 사골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리기 시작했다. 미주의 짧은 수고로 식탁에는 6시간을 푹 고은 사골국, 각각 고추장과 간장으로 볶은 두 가지 맛 멸치, 비행기 안에서 마침맞게 익었다는 깍두기, 들기름에 구운 김까지 차려졌다.
"오우, 비프 수프!"
구수한 사골국은 다행히 루이와 샬롯이 좋아하는 국이었다. 루이는 후추를 듬뿍 뿌려 국물을 떠먹기 시작했고, 샬롯은 흰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미자는 그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뿌듯해, 파리로 오기 전 약 열흘 동안 감당해야했던 수고가 싹 잊혀지는 기분이었다.
"맨날 바게트만 먹지 말고. 이제 민박도 하니까 든든하게 챙겨먹어. 알았지, 루 서방 그리고 샬롯? 내가 내일은 미역국 끓여줄테니까."
"쟝모륌, 씨위드(seaweed, 미역) 수프 최고예요!"
루이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최대한 미자의 말에 호응했다. 9년 전, 샬롯이 태어날 때에도 미자가 파리에 와서 함께 머물렀었다. 그 좁은 부엌에서 미자는 머무는 3주 내내, 미역국을 끓였던 터에 루이가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는 딸 때문에 작은 아파트에서 하루종일 고생하는 미자를 몇 번 파리 시내로 데리고 나갔었다. 에펠탑 야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센강을 산책하며 아이스크림이나 크레페를 나눠먹기도 하고,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 멋진 사진을 수십장 찍어주고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곤 했었다.
미자는 한국에 돌아가고나서도 몇 년 동안,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낯선 사위와의 시간을 미자는 본인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미주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평생 한량으로 살며 우두커니 거실에 앉아 TV만 보는 아빠,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안해 속을 썪이더니 군대를 다녀와서는 제 PC방 비만 겨우 버는 아들을 둔 엄마가 안쓰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파리의 거리를 걸었던 그 몇 번이 미자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오롯이 의탁할 수 있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오, 이제 디저트 타임!"
모두 그릇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은 탓에 저녁식사는 빨리 끝났다. 국그릇과 밥그릇을 싹싹 비운 루이가 퇴근 길에 사가지고 온 에클레르(Eˊclair) 쇼핑백을 들고 쇼파로 갔다.
"디저트 타임? 예~"
샬롯은 신이 나서 제 아빠를 쫓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웃던 미주가 말했다.
"제가 치울 테니 가서 디저트 좀 드세요. 엄마가 산후조리하러 왔을 때, 다른 건 잘 못드셔도 에클레르는 잘 드셨다면서 사오겠다고 하더라구요. 그 왜 안에 슈크림있고 겉에 초코크림 발라진거요."
"아, 그 초코빵? 조금만 먹어보야겠다. 가자, 미숙아."
그렇게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네 사람은 소파에 둘러앉았다. 정확하게는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카펫 위에 앉았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초코, 캬랴멜, 커피!"
루이는 에클레르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무슨 말인지 설명했고, 미자와 미숙은 알겠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주가 골고루 맛볼 수 있도록 칼과 접시를 가져다주었고 루이는 신중하게 에클레르를 자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에클레르를 자르자 안에는 슈크림이 가득 들어있었다.
"꼭 초코 크림빵 같은데, 맛이 고급스럽더라구."
"그래?"
미자와 미숙은 먹기 좋게 잘린 빵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샬롯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파리에 산다고 하지만 시내에서 파는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사오는 빵은 늘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고, 샬롯 입에 다 뭍었다."
"그렇게 맛있냐? 깔깔."
미자와 미숙은 종류별로 한 입씩 맛을 보고 나니 배가 불렀기 때문에, 남은 에클레르는 모두 샬롯의 차지였다. 작은 입에 에클레르를 넣다보니 샬럿의 입 주위는 어느새 초코크림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 모습을 본 미자와 미숙은 웃음이 터졌다. 미자에게는 유일한 손주였고 미숙에게는 아직 결혼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만에 본 샬롯이 한없이 귀엽게만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 동안, 미주는 어느 새 설겆이를 다 끝내고, 미자와 미숙이 가지고 온 음식을 정리하기 위해 종이 상자에서 주섬주섬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미주가 물건을 하나씩 풀 때마다, 미자는 마치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눈에 훤히 보이듯 설명을 했다.
"얘, 방산시장에서 국산 참깨를 샀잖니? 중국산은 깨가 납작하지만 국산은 통통하기 때문에 속을 수 없지. 그 참깨를 가지고 시장 초입에 있는 방앗간 알지? 거기 가서 짜왔다. 딱 세 병 나오길래, 한 병은 우리 집에서 쓰려고 남겨놨고, 너 갖다 주려고 두 병 챙겨놨어.
미주 만나러 프랑스간다니까 방앗간집 아주머니가 너무 부러워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뭐가 부럽냐고 그랬지? 그 전에 갔을 때는 산후조리해주러 간거고, 이번에 가는건 뭐 호텔인가 한다고 해서 가봐야하는거라고 했지."
"호텔이 아니고 민박이야."
미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딸에 대해 과대포장해서 말하곤 하는 엄마가 불편했다. 하지만 미자는 미주의 지적이 들리지 않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방앗간 왔다갔다하는 김에 가래떡도 좀 뽑고, 미숫가루도 만들어왔지."
"여기도 다 팔아."
"아휴, 지난번에 한인마트 가보니까 가격은 네다섯배로 받아먹으면서 한국 같으면 팔지도 못할 걸 팔고 있더라. 어디 그런데서 파는 거랑 직접 방앗간에서 국산으로 만드는게 같아?"
결국, 미숙의 시댁에서 농사지은 고춧가루, 배추, 무를 가지고 만든 김장 김치와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구했다는 완도 진미역까지 정리하고서야 화려한 선물 개봉식이 막을 내렸다.
"이제 우리 갈게."
미자와 미숙의 핸드폰에 와이파이를 연결해주고, 가족룸에 캐리어를 가져다 놓고, 간단히 화장실과 부엌 사용을 알려주고 나니 어느덧 샬롯이 잠들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내일 아침에 보자. 세 식구 다 와서 여기서 밥 먹고 가."
"푹 쉬셔."
"어차피 먹어야하는 아침인데 좀 더하면 되지. 반찬도 많고."
"아이고, 알았어."
어차피 미주는 엄마인 미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 다같이 오겠다고 말하며 비쥬네 민박집을 나왔다.
"당신, 그래도 전보다 많이 편해보여."
5분 정도 떨어진 집까지 가는 길. 샬롯의 손을 잡으며 걷던 루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래?"
루이는 미주가 엄마를 포함한 자신의 가족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파리에서 산지 9년이 되었지만, 미주는 자신의 가족을 딱 2번 만났을 뿐이었다. 파리에서 루이의 가족과 친구 열댓명을 초대해 간단히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는 임신으로 몸이 힘들어서 가족을 부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족을 파리까지 초청하는 비용이 부담되었을 수도 있고.
그 이후로 샬롯을 낳았을 때 미자가 파리에 와서 3주간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었다. 루이가 없는 동안 싸웠는지 미주는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미자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 있곤 했었다. 그럴 때면 루이는 미자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왔다.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미자는 루이와 함께 파리 시내를 다니는 것을 좋아했었다. 특히, 사진을 찍어줄 때 기뻐했었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샬롯에 첫번째 생일이 다가오자 미자는 결혼식은 파리에서 했으니 돌잔치는 한국에서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보채는 샬롯을 안고 달래며 겨우 한국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루이는 처음 미자의 아빠와 동생을 보았다. 좁고 낡은 미자 부모님의 집에서 아직 아기인 샬롯과 지내는 것은 불편했지만 괜찮았다. 루이 역시 그런 집에서 많이 살아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불편한 일은 돌잔치가 끝난 저녁에 일어났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도 돈 문제 때문에 싸운 것 같았다.
"뭐? 축의금을 다 가져가겠다고?"
"얘, 축의금에서 뭐 남는게 있는 줄 아니? 요즘 부페값이 얼마나 비싼데, 세상 물정도 모르는 소리 하고는! 그리고 엄마가 금반지 사줬잖아!"
"이러려고 우리 한국에 오라고 한거야? 우리 비행기값이 얼만데? 비행기값이라도 그럼 주던지!"
"얘는, 얘는! 축의금이 뭐 어디서 땅 파고 나오는 돈이니? 다 엄마 아빠가 지금까지 뿌린 걸 거둔거야. 결혼식도 한국에서 했으면 좀 좋아? 으이구, 항상 지 생각만 하지. 이기적인 것."
미자는 그로부터 1년 동안, 자신의 가족과 연락을 아예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이모인 미숙의 중재로 겨우 한 달에 한 두번 연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