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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jeje Oct 17. 2023

심리지원 프로젝트 2

    

1982년 시민권법에 의거하여 실질적으로 로힝야 족은 무국적이 되었고 자유로운 이동이 제한되었다. 2017년 소수 민족이었던 로힝야 구세군의 공격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미얀마의 무력적인 폭력이 시작되었고  로힝야 족은 피난을 떠나 방글라데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는 수년간 계속되었다. 그들은 끔찍한 박해와 차별로 오랫동안 미얀마로부터 소외당해왔다. 13만의 로힝야족과 다른 무슬림들은 라카인주 중심부에 있는 수용소 같은 정착촌에 머물고 있지만 기본적인 생활요건도 생계 수단을 위한 활동도 할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생활 여건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국적자로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동맹이나 선택권 등의 자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로힝야족을 겨냥한 미얀마군의 폭력이 재개되면서 인근국가인 방글라데시로 약 90만 8000이라는 최대 규모의 로힝야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세계 봉사단체를 비롯해 한국의 국경 없는 의사회와 NGO 단체 중 하나인 아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콕스바자르에 머물며 로힝야 난민들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하고 있다. 내가 잠시 참가 했던 아디는 방글라데시의 봉사팀과 한 팀이 되어 로힝야 여성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고 있었다. 대부분 한국에서 프로그램과 물자를 지원하지만  방글라데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난민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실지로 사적인 비용을 들여 들어온 어느 단체에서는 허가를 받지 못해 며칠을 기다리다 그냥 돌아간 예도 있다.


난민 촌에 머무는 시간는 4시간 정도로 정해져 있다. 이슬람인 그들의  저녁 기도 전에는 난민촌을 나와야 했고 콕스바자르에서 난민촌까지는 자동차로 로 거의 4시간이 걸린다. 비포장 도로에 비가 오거나 난민촌이 식량을 공급받는 날은 차량 정체로 그 이상의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내가 동료들과 담당한 일은 로힝야 여성을 상대로 트라우마를 완화시키기 위한 심리적 지원과 함께 그안에서자신을 보호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기 위한 만남이었다. 로힝야 여성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전혀 없었고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보호받지 못한 체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이 선택되고 주어졌다.  외부인과의 접촉이 금지 된 캠프에서 이슬람 여성들을 만나는 것은 예기치 못한 갈등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해서 난민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캠프에 도착하면 다시 한번 방글라데시 기관의 확인을 거친 후 우리가 담당해야 할 캠프로 가게 된다.  차를 이용해 그곳 전체를 돌아보는데 30분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캠프가 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만큼의 규모로 자리 잡고 있었고 내가 방문한 곳은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낮고 작은 천막은 한 치의 경계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사생활 보호라는 말은 그곳에서 무색할 정도였다. 제대로 옷을 걸친 아이들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캠프로 들어가는 길은 밤사이 내린 비로  버려진 오물과 질퍽거리는 진흙으로 뒤엉켜 그곳의 열악한 환경을 실감하게 했다. 곳곳에 세워진 칸막이도 제대로 없는 화장실 앞을 지나갈 때는 몇 시간을 여기서 버텨야 할 생리적 해결에 대해 걱정이 앞섰다.  

    

우리가 캠프를 도착해 들어가는 동안 10살도 안돼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서 거적을 덮은 보따리를 앞뒤에서 들고 황급히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누군가 아픈 것이라고 일행은 생각하고 어린아이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나쳤다. 그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의 다급했던 상황 얘기를 듣고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사생활의 보호가 되지 않는 열악한 갬프에서 피해자는 역시 여성이었다. 강간이 수시로 이루어졌고 남편이 없는 여성들은 식량 배급을 받으러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어린 아들이 가거나 캠프의 이장 격인 남성에게 부탁을 해야만 했다.  그 이장이나 혹은 다른 남성이  혼자된 여성들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성폭행은 물론 자신의 배급된 식량도 뺏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침에 목격한 장면은 그런 문제에 노출되었던 여성이 유산을 했고 그 아이들을 그 여성의 자식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캠프에서 병원으로 가는 데는 아이들 걸음으로 1시간 이상은 가야 한다고 한다. 더욱 층격적인 것은 아무도 그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행은 분개하며 슬퍼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글라데시 직원들조차도 그들의 생활에는 개입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로힝야 여성들에게 서로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서로의 눈길을 교환하며 진심이 담긴 몸짓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서로 나누어야 했다. 글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여성들은 숫자의 개념도 알지 못했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도 환경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로힝야 여성들에게 우리는 처음 만나는 세상 밖의 사람들이었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눈만 내놓은 이슬람 여성들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이질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그곳의 책임지격인 로힝야 남성의 허락이 있어야 만날 수 있어 로힝야 여성도 우리도 긴장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금이라도 종교적 문제가 발생을 하면 우리도 그곳 여성들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사전 교육을 받은 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 활동의 시작은 어릴 적부터 로힝야를 떠나 방글라데시에서 공부를 한 로힝야 출신 여성 변호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방글라데시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 나라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며 인권 변호사로 로힝야 여성과 자국민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 인상은 매우 당차고 매서운 말투와 전투적인 행동으로 카리스마가 있어 평범한 주부인 우리 일행에게는 위협적이면서도 존경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혼자서 이 상황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성별의 차이도 그 깊이의 차이도 없었다. 오히려 자국의 여성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그녀에게 숨겨진 여성만의 모성애가 느껴졌다. 여전히 그녀는 로힝야 여성들을 대표해 나라의 독립과 여성들의 변화를 꿈꾸며 어려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의 문제에 비하면 우리가 하고 돌아오는 기간이나 일들은 너무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 같은데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려 집중했고 소중하게 잘 활용하고 있었다.  

    

우선 트라우마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자가 호흡법으로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거나 완화시키는 법을 소개해 아이들과 가족에게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수련 팀을 만들어 교육을 거친 후 우리가 없을 때는 다른 캠프의 자국민 여성들에게 응급 처치 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 활동을 하는 여성들에게는 작은 돈이지만 단체에서 급여가 지급되었고 그것은 가족들을 위해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점차 교육 장소에 찾아오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한국의 지원팀들은 방글라데시의 봉사 팀에게 더 좋은 프로그램을 연구해 전하려고 노력했다. 한국 지원 팀이 돌아가면 그곳 봉사 팀이 캠프에  들어가 교육을 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실수도 착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팀의 고심과 노력도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로힝야 여성들의 열의가 더욱 스텝들을 자극했다. 우리 지원 팀은 하나라도 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전해주려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위해 고심했다. 결코 혼자서는 해 낼 수 없는 팀만이 해 낼 수 있는 성과였고 힘이었다.  로힝야 여성들의 열의는 간절함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의 마음 또한 간절함으로 답하게 했다. 무엇을 알려줘도 받아들이는 그들의 흡수력은 우리 일행을 감등과 감탄으로 놀라게 했다. 

억압된 여성들의 잠재력이 놀라울 정도의 능력을 보였다. 가족을 잃고 어린 자식과 부모를 보호해야 하는 여성들의 모성애와 절실함이 보여주는 힘이었다. 미얀마의 잔인한 살상에 가족을 잃고  이웃의 손길에 의해 피난길에 올라  보호받던 소녀가 자신을 지켜준 분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며  캠프의 교육을 찾아왔다.  30이 갓 넘은 여성이 5살 손자를 데리고 와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며 울먹였을 때 우리는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그녀를 환영했었다. 듣기만 해도 두려움이 엄습하는 실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각자의 사연은 우리 분 아니라 전 세계의 국제 봉사 단체를 로힝야 난민촌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생존의 법칙은 적용이 되었다. 어느 정도 교육 단계가 지나면 테스트를 거쳐 캠프 안에서 교육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적은 임금이 주어지는데 손자를 데리고 왔던 여성은 그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결혼의 연령이 빠른 무슬림 여성들에게 30대는  이미 나이가 든 축에 들어 교육 중에 젊고 어린아이들이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고 실지로 그녀가 소외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서로 도와야 할 처지에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쟁을 부추기는 봉사라는 명분이 과연 이들을 위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손이 짓물러가는 여성에게 연고 하나 개인적으로 줄 수 없는 그곳의 상황, 그 연고 하나 때문에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살인도 일어날 수 있다며 나의 친절을 리더가 가로막으며 무색하게도 했다.

      

오물에 넘어지면서, 문 없이 노출된 화장실을 피하려고 비 같은 땀을 흘리면서도 물 마시기를 거부해 결국 방광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그곳을 다시 찾게 되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의 안녕이 궁금했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보냈던 눈빛이 그리웠다. 비참한 환경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미소밖에 보낼 수 없었던 그들과 내 삶의 다름이 주는 인생 무상함도, 그 자리를 떠나오면 다시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안타까움이 인간적인 죄스러움과 연민만을 곁에 머물게 한다. 

     

빈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막연한 활동에도 그들을 위한 교육 장소가 제법 규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여성들만을 위한 문달 린 화장실도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여성들의 소통 힐링 장소인 ‘산타카나‘라는 조금 한 간판도 붙었다. 오롯이 여성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장소이다. 그곳에 지원된 재봉틀로 가족을 위해 옷을 만들기도 하고 그 기술로 경제적인 활동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언어 공부도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소식만을 이제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빈 마음으로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안녕과 그들의 자립을 위해 기도속서만  그들에게 머문다.  

   

그나마 코로나 때문에 잠시 교류는 멈추었지만 코로나 종식 후 다른 팀원들이 남은 기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기 위해 곧 출국을 한다. 그들이 싣고 가는 지원물품에 나의 마음도 함께 포장해 실어 보낼 것이다. 그리고 11월 17일 우리 팀원들은 아디의 주선으로 그동안의 활동을  보고하고 추억하며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 또한 다음 계획을 위한 시작이다. 

로힝야 여성들은 나에게 여성들의 숨겨진 내면의 진실과 그 누구도 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배움이나 지식이 아닌 사랑이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로힝야 여성들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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