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gjeje Oct 05. 2023

심리지원 프로젝트1

보랏빛 여름

밤 10시가 넘어서 방콕 공항에 도착했다. 9시간 정도를 공항에서 머물고 새벽에 방글라데시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보다 환승을 위해 공항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 의자에 앉아 꼬박 밤을 보내야 했다.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효율성 없는 환승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목적이 같은 일행이 있어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대신 몸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차 때와는 달리 2차 때는 아디로부터 받은 프로젝트지원금이 있어 작은 호사를 누려보기로 했다. 꼬박 이틀이 걸리는 행로에 피로를 줄이기 위해 방콕에 도착하면 공항 가까운 호텔에서 몇 시간이라도 편한 잠을 자기로 했다. 모두 중년을 넘어선 여성들로 의자에서 9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무리수를 갖고 있었다. 1차 때 호기로 경험한 공항 의자에서의 쪽잠은 이제 사양한다는 것이 일행의 의견이기도 했다.


밤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수속을 마친 일행은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미리  예약 한 호텔의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고 두 대의 차로 나뉘어 출발했다. 이질적인 태국 냄새가 쏟아지는 빗줄기에 씻겨 사라지고. 늦은 밤 불빛 없는 거리는 기억에 넣어 둔 너저분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거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작고 후미진 길들을 돌아 택시가 호텔에 도착했다. 일행은 도착하는 순간 몇 시간 눈만 붙이는 것이니 비싸지 않은 곳으로 했다고 강조했던 총무의 말을 알아차렸다.

방은 마치 하나의 방을 칸막이로 막아 쪼개놓은 것처럼 작았고 얇은 벽으로 막혀있었다. 불을 켜자 습한 여름밤의 벌레들이 선잠에서 깨어 허둥댄다. 벌레들만큼이나 일행도 예기치 못한 호텔 시설에 당황했다. 나는 침대에 누우면 벌레와 원하지 않는 동침을 할 것만 같아 서성거리고 있었다. 룸메인 동료가 쓰러지듯 먼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곤해서인지 움직임이 없다. 나도 조심스레 침대 끝자락에 몸을 걸쳤다. 옆방에서 던지는 잘 자라는 인사가 버티고 서 있는 방어벽을 무색하게 했다. 일행의 장난기에 그녀도 침대 끝에 매달려 웃음을 터트렸다. 두 여자의 웃는 소리가 몸에 실려 침대의 스프링이 출렁거렸다. 룸메이트가 소리쳤다.

”누가 이 호텔 예약하셨나요. “

”네 접니다 “ 옆방에서 총무가 대답을 했다. 동시에 두 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오랜만에 턱관절을 벌린 채 크게 웃었다. 외롭지 않았고 짧고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결혼 후 간헐적으로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NGO와 관련된 기관을 통해 해외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고 살았다. 거기에는 남편을 떠나 자유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함께 숨어있었다. 그 욕망 뒤에 숨어있는 진정한 욕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싶은 나의 이타적인 본성이 가려져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뜨거운 여름 난민 천막촌에서 나는 비로소 알아차렸다.  

    

검은 물빛의 거친 파도와 120킬로미터를 넘는 부드러운 모래 해변을 품은 콕스바자르 해변은 나를 단숨에 매료시켰다. 보헤미아에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마음처럼 미얀마의 아웃 사이더가 된 로힝야 난민 여성들과의 만남은 나를 더욱 깊은 인간애에 빠지게 했다.


물기 빠진 광활한 자갈밭에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회색빛 천막을 바라보다 꿈을 깬 적이 있다. 그곳을 내려다보는 나의 모습은 사막을 지나는 순례자처럼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메마른 강가의 흙먼지를 뒤집어쓴 천막들은  마치 죽어버린 나의 감정 같았다. 꿈속에서 슬프고 서늘하게 느껴졌던 마음이 꿈에서 깬 후에도 한참을 갔다.

마치 예지몽을 꾼 것처럼 그 후 나는 콕스바자르의 로힝야 난민촌 여성들을 위한 심리지원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90만의 난민이 모여 사는 콕스바자르의 발주칼리 난민촌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난민촌의 모습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메마른 천막촌이 마치 데자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옷 속에 숨겨진 십자가 목걸이에 손이 올라갔다.


지원팀이 출발하기 전, 로힝야 난민촌은 이슬람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여성에게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라고 교육받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항상 걸고 다니던 십자가 목걸이를 빼려고도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에게도 보이지 않는 힘이 필요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면서 그 감정을 담고 풀어 준 마음의 은신처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난민촌에 도착해 출입증을 받으려고 기다리면서 십자가 목걸이가 보이지 않도록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 예지몽이라는 낱말이 휘장처럼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십자가를 옷 위로 꺼내 놓으며 메마른 이 땅에 꿈처럼 서 있는 내 모습에 감사했다.


첫 방문 때는 자비로 합류 했다. 리더가 활동 내용을 아디에 보고 하며 다음 프로젝트 계획을  브리핑했다. 그 결과로 다음 활동비는 지원을 받게 되어 일행은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매일 속을 메스껍게 하는 말라리아약을 먹고 장티푸스 주사도 맞아야 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년에 들어선 일상생활이 점점 나를 지치게 할 때 로힝야 난민을 위한 심리지원프로젝트는 그동안 맛보지 못한 소속감과 숨겨진 열정을 풀어놓게 했다.


비가 멈춘 이른 아침의 호텔은 빗물로 이미 몸단장을 하고 일행을 맞이했다. 밤에 느꼈던 어설픈 분위기와는 달리 작고 허름하지만 호텔 로비는 아늑하게 느껴졌다. 하룻밤의 동침이 주는 정겨움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쾌쾌한 방콕 거리의 냄새와 뜨거움 마저도 가슴을 달콤하게 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로힝야 난민촌의 여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나눠 주는 한 조각의 샌드위치를 생각하며 일행은 빈속으로 다카를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또 하루가 지나야 우리는 콕스바자르에 도착할 것이다. 비행기는 여름 하늘을 독차지한 체 태양을 품고 날아가고 있었다. 익숙한 샌드위치 냄새가 허기진 배를 자극해 왔다. 비행기는 더 깊은 보랏빛 여름을 향해 구름 속으로 파고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를 기다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