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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jeje Nov 07. 2023

11월의 재즈 한 모금

아기가 아픈 것은 성장을 위한 진통이다. 노인이 아픈 것은 이제 성장할 것이 없다는 신호다.

간헐적인 병상의 날들이 점점 그 시간도 촘촘해져 간다. 언제부턴가 작은 병 앞에서도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성급하고 겁 많은 두려움은 일상과 삶들에 대해 겸손과 감사 속에서 사랑을 깨닫게 하지만 11월의 사라져 가는 낙엽에 눈물 한방을 떨어뜨리는 허무함도 있어 가슴 저리다.


며칠의 병상을 털고 메마른 얼굴에 윤기 나는 크림을 바르고 며칠사이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기온에 패딩 코트를 입고 친구를 만나러 나선다.

오래전에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명동 성당의 '재즈와 교회음악' 연주회에 가기 위해서다. 아직 남아있는 병치레의 부유물이 간혹 몸 전체를 돌아다니며 한번씩 통증을 유발하지만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과 성당에 울려 퍼질 음악을 상상하니 견딜만하다. 스모그가 내려앉은 거리는 아직도 개운하지 않은 내 머릿속처럼 뿌연 하지만 그 공기마저 신선해 긴 호흡을 들이켜 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당의 연주 시간보다 더 여유 있게 만나기로 했다. 명동 성당을 오르기 전에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벨기에 초콜릿 카페에 들리기 위해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그 카페는 특히 핫 초코가 맛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그 규모가 축소되고 있지만 진하고 달콤한 그 집 만의 핫 초코 맛은 변하지 않았다.  친구와 만날 때 명동 성당을 선택하는 것은  그 카페를 가기 위해서이다.

오랜 세월 서로를 의지했던 친구처럼 이 카페도 오랜 세월 내가 찾던 장소다.  

다른 곳보다 항상 아침 일찍 문을 여는 벨기에 초콜릿 카페에는 아직 손님이 없어 친구와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시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시간,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지켜 카페에 들어선 우리는 마침 흐르는 재즈의 선율에 눈을 마주하며 소리 없는 웃음으로 반가움을 전하고 거침없이 핫 초코 두 잔을 시킨다. 그동안 병치레로 허기지고 떨어진 열량을 보충하기에 아주 적절한 선택인 것 같아 벌써 기분은 업 되고 의기양양하기까지 하다.


때 마침 흐르는 아침 카페의 재즈 선율이 그동안의 나를 잊고 오늘만을 위한 시간에 진심을 보내게 하는 감정의 휘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막 나온 핫 초코의 뜨거운 맛을 잊어버리게 했다. 뜨거울 때 최상의 맛을 내는 그 순간을 놓아버릴 만큼 친구와 나의 손을 핫 초코 잔에서 떼어 놓는 음악의 선율,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몸이 기억하는 리듬감에 친구와 함께 동행했던 시카고의 재즈 거리를 떠올렸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는 시카고의 밤은 골목마다 재스와 블루스, 흥겨운 스윙의 연주가 추위에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고 쌓여가는 눈 위에서 춤을 추게 하는 매력이 있다.

재즈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친구와 나는 독특한 거리의 재즈 마니아들과 함께 그 리듬에 몸을 맡긴 적이 있었다. 어두운 불빛에 빛나던 눈 날림과 이질감에 공포스러웠던 흑인의  몸사위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다가가게 하던  재즈바 앞의 젊은 흑인 무리들, 여유가 없어 바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밖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던 피아노와 색소폰, 그리고 묵직한 콘트라베이스에 밤의 어둠을 가르며 흐느적거리는 여가수의 목소리까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아주 추운 거리의 유혹이었다.  


오늘 아침 조용한 카페에서 불러일으키는 흥분에 잠시 친구와 나의 침묵하는 시간이 흐르고 동시에 우리는 그 추억의 시간에 머물렀다.

그때 경험은 나와 친구를 가을이면 가평에서 열리는 재즈콘서트의 마니아가 되게 했고 흑인 음악은 물론 그들을 애정하게 했다. 언제나 재즈 음악이 흐르는 명동 벨기에 초콜릿 카페를 그리워하게도  했다. 오랜 학창 시절 친구와의 비밀 장소이자 둘만의 추억이 있는 음악, 그리고 핫 초코, 친구와 나는  지금 11월이 녹아가는 핫 초코에 재즈 한 수 푼을 더하며 우정을 마시고 있다. 가슴 시리던 허무함도  성당의 음악회도 잊은 채 재즈 한 모금에 추억의 달콤함을 음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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