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저작권

by bigjeje


병원으로 향하는 발길은 조급하면서도 느리다. 내 병명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난 5년 전 초음파를 통해 췌장에 물혹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1년 반 정도의 간격을 두고 3번에 걸쳐 종합병원에서 추적 관찰을 했다. 오늘이 그 세 번째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오후로 잡힌 예약 시간은 밤잠을 설친 오전 내내 내 마음을 졸이게 했다. 초조함 때문에 일찍 집을 나선 덕분에 환승역부터 병원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얄밉도록 날씨는 화장했다. 시원한 바람이 짓궂게 살갗을 스치는 순간마다 마음은 저렸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운 눈빛으로 가슴에 스며드는 세상은 마치 다가오는 죽음을 맞으러 가는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아 마음을 경망스럽게도 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궂은 날씨가 마음 편할 것 같았다. 병원 후문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은 장례식장이었다. 아름다운 햇살이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무심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날씨가 다행이라고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 좋은 날에 가셨다며 상실의 슬픔을 위로 할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을 막 빗겨 나와 본관으로 들어설 때 피할 수 없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긴장감이 입을 건조하게 했다. 혈압약도 미리 먹고 왔는데 치솟는 숫자를 보니 정말 몹쓸 병인가 싶어 마음이 호들갑을 떨었다.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더 고역이었다. 진찰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결과지를 들고 다시 간호사의 호출을 받고 갈 때면 괜스레 그 사람의 안색을 살피게 된다. 이때 한 중년 여자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나왔다. 입원할 날짜를 정하자며 간호사가 여자와 아들을 불렀다. 아들은 어머니의 검사 결과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힘없이 서 있었다. 그런 아들의 손을 어머니가 잡아당겼다. 아픈 분은 어머니 같은데 그녀는 당황하는 아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찡하고 코끝이 매웠다. 아픈 사람도 안 됐지만 진찰 결과에 놀란 듯한 그녀의 아들이 더 안쓰럽고 걱정됐다. 순간 나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혼자 온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곧 듣게 될 알 수 없는 결과에 추운 사람처럼 몸이 떨렸다.

‘아직 미동이 없는 것 보니 가성 낭종인 것 같습니다. 이제 큰 병원에는 오시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집 근처 병원에서 한 번씩 체크는 하셔야 합니다.’

의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웃어라도 주면 더 실감이 날 텐데 그 한마디만을 듣고 바로 진찰실을 나왔다. 다행히 췌장에 숨어 있는 물혹은 움직임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 녀석은 늘 나를 긴장시켰고 그럴 때마다 손은 어느새 배 언저리에 얹어져 있었다.

결과를 보고 나오면 할 일 없는 것 같은 한가로움과 아직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느낄 긴장감이 교차한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걸 곧 알아차리게 한다. 그것은 아침을 거른 뱃속에서 보내는 허기짐이다. 그 병원은 아픈 사람을 위한 최적의 장소지만 그런 병원의 지하는 건강한 사람을 위한 최고의 장소였다. 다양한 먹거리와 쇼핑몰, 미니 박물관과 갤러리까지 있다. 그런 분위기는 환자 보호자나 걱정을 안고 온 방문객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역할도 했다. 특히 다채로운 종류의 식당은 환자가 같이 공존하고 있는 장소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식욕을 돋우는 식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식사를 시켜 놓고 기다리는 옆 테이블에는 내가 주문할 때부터 이미 음식을 받아 놓고도 먹지 않고 있는 부부가 목소리를 낮추며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암 말기라는데 알려야지’

‘아니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하게 알려. 너무 충격이 크실 테니 그냥 모르고 가시게 하는 것이 더 낫지’

나는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모른 척 식사를 마쳤다. 두 사람의 의견은 아직도 합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의사도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니 빠른 결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끝내 두 사람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난 그 자리를 떠났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잔인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알아야 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 암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을 때는 나도 병명도 모른 채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처음 큰 병원에 가보라며 의사에게 소견서를 받았을 때는 병원에 가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각오도 했다. 하지만 검사를 받으러 다니면서 곧 내 생의 시간이 한정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마음을 변화시켰다. 우선 쓸데없는 물건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족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남편과 아이들에게 표현이 부족 했던 나의 변화였다. 긍정적인 것도 마음의 불편함도 서로 털어놓으며 상대방 의사에 신경 썼다. 서로의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남아있는 가족의 슬픔은 더 클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우리의 태어남 자체는 내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사는 동안의 삶은 온전한 나의 의지로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삶을 정리하는 것도 내 몴이고 내 고유의 권한이 되어야 한다. 내 삶은 내가 만든 나의 신화이자 역사다. 그러므로 그 장편 서사의 주인공은 곧 ‘나’다. 그래서 정해진 운명의 끝자락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기 전에 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죽음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다른 이의 생각으로 빼앗겨서도 안 된다. 어쩌면 살아온 시간보다 죽는 순간이 당사자에게는 더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예술 활동에 저작권이라는 법적인 장치를 만들어 그 주인공을 보호한다. 또 저작권은 창작한 작품의 작가를 공식적으로 명시해 그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지켜주고 고유함을 보호한다. 한 인간의 삶은 위대한 창작이자 아름다운 서사가 깃든 ‘생의 작품’이다, 그 작품에 마지막 인증의 마무리에 저작권의 권한을 부여하여야 한다. 그것이 곧 ‘생명 저작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죽음을 본인이 알아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알리지 않고 갑자기 떠나게 한다면 자신의 ‘생명 저작권’에 대한 인증 마무리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내 삶을 살아낼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처럼 죽음 또한 내가 준비하고 떠나야 하는 책임과 권리가 있다. 하지만 무력한 죽음은 자신의 생명 저작권을 지킬 의식도 힘도 없다. 그래서 그것을 인정하며 지켜줄 남아있는 사람의 윤리적 도리가 요구된다. 일반 저작권에 법적인 규제에 앞서 윤리적 양심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삶에서 가장 경이로운 죽음의 시간을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편승시켜서는 안 될 것 같다.

난 그 부부의 결론이 궁금했다. 어떤 결정을 하든 환자를 위한 답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장례식장이 다시 보였다. 장례식장 앞에 있는 편의점에는 조문객인 듯한 사람들이 커피 한잔으로 지난 밤샘의 피로를 달래고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며 만약 내가 죽게 될 상황이 온다면 반드시 그 죽음을 알려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아메리카노 한잔은 마시고 떠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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