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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09. 2023

[D+79] 멍 때리는 즐거움

미국, 라스베이거스

문자로만 주고받을 땐 호스트 코라가 좀 어렵다 생각했었다. 


거의 단답형 답변에 가끔 오타인지 뭔지 이해 안 되는 영어 문장이 섞여있어 선입견이 생겼었다. 그래서 좀 걱정을 했었는데 어젯밤 몇 마디 나눠보니, 케이프타운의 야니 이후로 쿨내가 진동하는 대찬 아줌마였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서 뻥 좀 보태면 말의 절반이 'F' 워드인 데다 이 집에서 니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며 글자 그대로 '내 집'처럼 지내라고 한다. 한국에서 2년 가까이 영어 강사를 했던 사람이라 이태원, 해방촌, 불고기, 김치를 줄줄 읊는다. 


집에 온갖 종류의 술은 다 있는 것 같고 커피보다 콜라와 크림소다와 핫초코를 즐기는 아줌마. 고양이를 진심 사랑하고 고양이 소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줌마. 수다 떠는 건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다 까발리는 아줌마. 


(아주 어릴 때부터 불면증이 심했다는데 한 번은 6일을 연장 깨어있다가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들어간 적이 있단다. 병원의 신고로 경찰이 와서 헤로인부터 온갖 마약류 검사를 했는데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지금도 정신과 처방을 받고 있다고. 수면제가 없으면 잘 수가 없는 상태라 밤늦게 TV 소리가 좀 들리더라도 이해해 달라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대중교통 역시 정확한 정보를 찾기 힘들었는데(나처럼 메인 번화가를 벗어난 곳에 묵는 관광객이 거의 없다 보니) 겨우 알아낸 바에 의하면 '관광객'과 네바다주 아이디를 가진 '거주민'이 살 수 있는 교통 패스 종류가 다른 것 같았다. 요금도 거의 3배 차이가 나는 데다 관광객은 최대 3일권 밖에 살 수 없는데 거주민은 같은 돈으로 7일권을 살 수 있었다.


내가 알아낸 이 사실이 맞는지 물었을 뿐인데 조용히 목소리를 깐 코라가, '7일권이면 되겠니? 말만 해' 하고 말했다. 나 이 아줌마랑 사랑에 빠져버렸다.


고양이 덕후의 집


코라가 얼마나 사랑받는 호스트인지 보여주는 게스트의 방(내 방 아님)




여행 와,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내가 혼자 있는 걸 격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평일엔 일과 저녁 약속 등이 많아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빴고, 이런 이유로 주말엔 어떤 약속도 만들지 않고 집 밖엘 나가지 않았었다. 나는 이런 패턴이 그저 잠이 모자라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혼자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혼자서 멍 때리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건설적이든, 비관적이든, 쓸데가 없든, 생각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건가 보다. 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을 만나면 또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 '혼자 있기'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 '그랜드캐년 투어'를 앞두고 어제 도시 간 이동도 했겠다, 오늘은 체력을 좀 비축하기로 했다. 이럴 땐 내가 제일 잘하는 멍 때리기가 딱이지. 


주인도 없는 집에서 거의 종일 앉아 있다가 문득 집이 참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고양이들을 보게 되었는데 어쩜 저리도 무료해 보일 수가 있을까. 얼굴에 심심이 가득해 보였다.


문득 우리 집 애들도 똑같잖아? 란 생각을 했다. 두 마리가 함께 있고, 집 안에만 살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에 주인이 없고, 그나마 주인이 있는 날도 집안에 소리란 게 거의 없다는(멍만 때리니) 사실이 말이다. 미안해졌다.


깜장이가 매사 의욕도 없고 살도 좀 빠진 거 같아 우울증으로 의심된다는 임시 집사님의 전언을 들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 아이들도 이제 노령묘에 접어드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아이들의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겠다. 우선 멍 때리는 시간을 좀 줄이고 같이 놀아주기부터 해야지. 


그나저나 투어업체에서 나는 시내 호텔이 아니라고 픽업을 안 해준다네? 이 새벽에 버스를 타 볼까??


멍 때리기엔 불멍이 최고지


만져보면 너무나 작고 여린 선샤인


잘 생긴 갤러는 내게 아직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림일기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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