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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10. 2023

[D+80] 여사님

미국, 라스베이거스

'의지의 한국인들만 가능'하다는 장장 19시간짜리 <그랜드캐년 투어>를 다녀왔다.


새벽 2시, 리프트가 안 잡힐까 싶어 약속시간보다 넉넉히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빨리 잡힌 리프트와 밤이라 도로가 뻥뻥 뚫린 탓에 거진 1시간이나 일찍 미팅 포인트인 호텔 입구에 도착해 버렸다.


혹시 몰라 비니와 패딩과 스카프로 완전무장을 했음에도 새벽의 라스베이거스는 벌써(11월이니) 바깥공기가 무척이나 쌀쌀했다. 추위나 피해볼 요량으로 들어간 호텔 로비엔 이 야심한 시각임에도 슬롯머신들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지금 내 지갑엔 시애틀에서 틈만 나면 바꾼 1달러짜리 지폐가 많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기계에 1달러를 넣고 1회에 10센트짜리에 도전.


버튼 두 번 누르고 10달러에 당첨. 비기너스 럭이 이런 거라니.


조용히 바우처를 들고 캐셔한테 가서 현금화를 한 뒤 바로 로비로 나왔다. 이 돈으로 내일 다시 도전해 보겠다는 주먹을 불끈 쥐고선.


비기너스 럭에 당했다


투어는 일단 라스베이거스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유타주의 '자이언 캐년'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며 유타와 애리조나주에 걸쳐있는 '그랜드캐년'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중간에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에 있으며 삼성 광고와 윈도우 바탕화면으로 유명한 '엔텔로프 캐년', 콜라도 강줄기가 만들어낸 '호스슈 밴드' 등에도 들른다.


말발굽 모양이라 이름도 호스슈


파노라마로 안 찍을 재간이 없다


이노무 땅덩어리는 무엇이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엔텔로프 캐년. 물의 힘이 바위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도대체 어느 지점이 트럼프를 닮았단 말인가


그랜드 캐년이란 걸 보긴 봤습니다만, 날씨가 정말 안 도와줍디다


극한직업, 여행 가이드


19시간 동안 네바다 주까지 총 3개의 주를 넘나드는 건데, 진짜 한국인들 아니면 미쳤구나 소리를 들을 거리와 일정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하나도 힘든 투어가 아니었다.


시작부터 10달러를 벌... 어서 인건 아니고 투어 멤버가 모조리 20~30대 커플 혹은 친구들인데 나 혼자 달랑 싱글이라 차량의 맨 앞 조수석에 앉는 특전을 누렸기 때문이다. 좌석도 널찍해서 가져온 목베개와 함께 이동 중 잠도 잘 잤고 무엇보다 지나치는 온갖 풍경들을 거의 아이맥스급으로 즐겼으니 말이다.


이게 하루에 가능한 날씨라니


라스베이거스에 와서 눈을 구경하게 될 줄이야


마지막은 후버댐에서 보는 은하수. 별자리 어플로 멤버들에게 인기를 좀 끌었다


하지만 딱 하나 신경이 좀 쓰인 게 있었으니.


올해 예순다섯이 되셨다는 가이드 아저씨(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엔 동안이셨음)가 나를 투어 내내 '여사님'으로 부른 거다. 투어 신청 시 나이대를 적어야 해서 40대 후반으로 알려줬더니 그러신 듯한데, 이 호칭이 듣기 싫었던 건 아니고 난생처음 이런 호칭으로 불려보니 내 나이 듦, 정확히는 내 나이 먹은 얼굴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되더라.  


나는 (얼굴이) 젊어 보인다 혹은 늙어 보인다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편이다. 정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나면 참 다들 많이도 늙었네 하고 생각하는데 그 세월이 왜 나라고 비껴갈까. 나도 이젠 여사님 소리를 들어도 충분할 만큼 늙은 얼굴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늙어가는 내 얼굴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그 얼굴에 맞는 옷차림은 다른 문제다. 나는 지금 내 나이대에 맞는 옷을 입고 있는가, 하는 문제. 극단적으로 말해 70대 할머니가 힙합 가수 같은 옷을 입고 다닌다면 나라면 정말 눈살을 찌푸릴 것 같다. 개인의 취향 존중과는 별개다.


직장을 다녔다 해도 복장 규정 같은 게 없는 영화사들이었다 보니 20~30대까진 정말 별의별 스타일(이라고 하긴 뭐 하고 그냥 활동하기 편한 옷들)의 옷을, 남의 눈 의식 않으며 입고 다닌 나였다. 문제는 여전히 내 옷장에는 그 옷들이 남아있고 지금도 입고 다닌다는 거.


오늘처럼 머리는 탈색한 숏커트에 귀여운 방울이 달린 비니를 쓰고 찢어진 청바지와 손목과 목 뒤엔 문신이 있는 이런 '여사님'을 보는 젊은 친구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늙었으니 (전형적인) 노인처럼 하고 다녀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건 충분히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는 일이니깐. 그래요, 나 남의 눈 무지하게 의식하는 여사님이에요.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야 한다는 그랜드 캐년까지 와서 옷차림에 대한 고찰이나 하고 있는 나란 인간. 아이러니한 건 남의눈을 의식하긴 해도 여전히 그냥 밸 꼴리는 대로 입고 살고 싶은 1인.


결국 정답은 아. 몰. 랑.


그림일기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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