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
정확히 21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왔다.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꿈속에서 그랜드 캐년을 다녀온 것만 같아 어리둥절했다지. 어젯밤 가이드 아저씨가 서비스차원에서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
"여사님! 후기 꼭 써주세요"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사흘 만에 메인 번화가인 스트립을 오늘 처음 나갔다. 이런 청개구리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찌하다 보니 매번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을 꼭 뒤늦게 가게 된다. 놀랍지도 않은 게 대부분의 유행을, 늘 한물이 가고 나서야 우와~ 하며 덕질하는 인간이니깐.
무튼 오늘 저녁에 태양의 서커스 중 하나인 '르레브' 공연이 예약되어 있어 욕심 안 부리고 공연장이 있는 윈호텔 주변만 뱅글뱅글 돌았다. 트레져 아일랜드에선 어벤저스 샵에서 놀고 이름 모를 호텔 안에서 곤돌라와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구경하다 미라지 호텔까지 진출했다.
사실 이 모든 동선엔 이유가 있긴 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방문하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임시 집사님에게만 기념엽서를 보내는데(누군 보내고 누군 안 보내고 가르기 싫어서) 이 땅 넓은 라스베이거스에선 우체국 하나 가려해도 번화가임에도 버스 타고 40분이나 가야 하는 거다.
검색을 해보니 페덱스가 호텔마다 우편 서비스를 하길래 페덱스 찾아 삼만리를 하다 그리된 것. 즉 난 오늘 엽서 사러 호텔 가고 엽서 부치러 호텔 가고 밥 먹으러 호텔 가고 공연 보러 호텔을 갔다. 관광객이 할 법한 모든 일이 호텔 안에서 다 해결되는, 뭐 이런 도시가 다 있지?
공연이 열리는 윈호텔에서 예약한 티켓을 픽업한 뒤 1시간가량이 남았다. 당연하게도 호텔 1층엔 눈 돌아가는(좋아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눈이 팽팽 도는) 슬롯머신들이 즐비했다. 어제 딴 10달러를 투자해서 얼마나 이 돈을 지킬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조작이 쉬워 보이는 기계 앞에 앉았다. 기계 위에 적힌, 잭팟이 터지면 받을 예상 금액을 보며 저 돈이 걸리면 어쩌지? 하는 일장춘몽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공연 따위 취소하고 카지노 사무실에서 돈을 송금할 방법을 찾아야지. 연금처럼 받으면 세금이 크지 않다던데 국제법 변호사라도 불러야 하나? 그것보다 당장 이 호텔의 쇼핑몰에 가서 옷이랑 신발부터 살 거다.
하지만 결과는 마이너스 8달러. 뭐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야금야금 벌다가 잃다가 하다 보니 추가로 내 돈 10달러까지 더 쓰고 말았다. 참 허무한 게 도박이더라. 앞으론 일확천금 꿈꾸지 않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들 중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꼭 봐야 할 3대 공연으로 꼽히는 '오 쇼', '카 쇼', '르레브 쇼'. 이 중에 지인들의 강추가 가장 많았던 르레브 쇼는 내 인생 공연이 되어버었다.
원형의 객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이 벌어지더니, 공연 시작 전 쳐놓았던 천정의 천이 위로 빨려 올라가는 순간부터 내 혼도 빨려 들어가 버렸다. 정말이지 눈이 몇 십 개쯤 달려서 공연장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워낙 넓은 공간이다 보니 오른쪽을 보는 동안 볼 수 없는 왼쪽과 정면의 장면이 아까워 연신 고개를 180도로 왔다 갔다 했다.
어마무시한 높이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와이어줄만 지운다면 스크린도 없는데 눈앞에서 사람이 날아다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을 거다. 서커스라는 전통적인 공연 방식에서 생짜 몸으로 보여주는 특유의 컨셉만을 가져와, 이렇게 현대적 기술과 방식으로 변형시킨 시도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잘 찾아보면 우리도 과거의 것들을 재해석해서 공연의 소재로 삼을 게 많을 것 같단 생각을 해봤다. 물론 나 말고 어떤 천재들이 하겠지.
공연 막바지에 큰 충격을 먹은 것 하나. 군무를 추는 남자 배우 중 한 사람의 다리가 종아리쯤부터 의족이었다. 세상에나. 신경 써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너무나 힘차게 춤을 추던 그에게,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박수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계획에 없던 '카 쇼'마저 예약을 해버렸으니. 내가 언제 또 라스베이거스를 오겠어,라는 생각보다는 정말 쇼가 궁금하고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은 뭐, 밥 좀 굶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