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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11. 2023

[D+81] 인생 공연

미국, 라스베이거스

정확히 21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왔다.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꿈속에서 그랜드 캐년을 다녀온 것만 같아 어리둥절했다지. 어젯밤 가이드 아저씨가 서비스차원에서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


"여사님! 후기 꼭 써주세요"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사흘 만에 메인 번화가인 스트립을 오늘 처음 나갔다. 이런 청개구리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찌하다 보니 매번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을 꼭 뒤늦게 가게 된다. 놀랍지도 않은 게 대부분의 유행을, 늘 한물이 가고 나서야 우와~ 하며 덕질하는 인간이니깐. 


무튼 오늘 저녁에 태양의 서커스 중 하나인 '르레브' 공연이 예약되어 있어 욕심 안 부리고 공연장이 있는 윈호텔 주변만 뱅글뱅글 돌았다. 트레져 아일랜드에선 어벤저스 샵에서 놀고 이름 모를 호텔 안에서 곤돌라와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구경하다 미라지 호텔까지 진출했다.


뽕을 뽑는 어벤저스 캐릭터들
호텔 구경이 크게 재밌지는 않았다지


참으로 다양하게 관광객을 즐겁게 하는 도시긴 해


호텔 간 이동을 돕는 모노레일


사실 이 모든 동선엔 이유가 있긴 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방문하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임시 집사님에게만 기념엽서를 보내는데(누군 보내고 누군 안 보내고 가르기 싫어서) 이 땅 넓은 라스베이거스에선 우체국 하나 가려해도 번화가임에도 버스 타고 40분이나 가야 하는 거다. 


검색을 해보니 페덱스가 호텔마다 우편 서비스를 하길래 페덱스 찾아 삼만리를 하다 그리된 것. 즉 난 오늘 엽서 사러 호텔 가고 엽서 부치러 호텔 가고 밥 먹으러 호텔 가고 공연 보러 호텔을 갔다. 관광객이 할 법한 모든 일이 호텔 안에서 다 해결되는, 뭐 이런 도시가 다 있지?


고수로 사람을 죽이려는 시도라니


이제 엽서 보내기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니


공연이 열리는 윈호텔에서 예약한 티켓을 픽업한 뒤 1시간가량이 남았다. 당연하게도 호텔 1층엔 눈 돌아가는(좋아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눈이 팽팽 도는) 슬롯머신들이 즐비했다. 어제 딴 10달러를 투자해서 얼마나 이 돈을 지킬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조작이 쉬워 보이는 기계 앞에 앉았다. 기계 위에 적힌, 잭팟이 터지면 받을 예상 금액을 보며 저 돈이 걸리면 어쩌지? 하는 일장춘몽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공연 따위 취소하고 카지노 사무실에서 돈을 송금할 방법을 찾아야지. 연금처럼 받으면 세금이 크지 않다던데 국제법 변호사라도 불러야 하나? 그것보다 당장 이 호텔의 쇼핑몰에 가서 옷이랑 신발부터 살 거다.  


하지만 결과는 마이너스 8달러. 뭐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야금야금 벌다가 잃다가 하다 보니 추가로 내 돈 10달러까지 더 쓰고 말았다. 참 허무한 게 도박이더라. 앞으론 일확천금 꿈꾸지 않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들 중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꼭 봐야 할 3대 공연으로 꼽히는 '오 쇼', '카 쇼', '르레브 쇼'. 이 중에 지인들의 강추가 가장 많았던 르레브 쇼는 내 인생 공연이 되어버었다. 


원형의 객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이 벌어지더니, 공연 시작 전 쳐놓았던 천정의 천이 위로 빨려 올라가는 순간부터 내 혼도 빨려 들어가 버렸다. 정말이지 눈이 몇 십 개쯤 달려서 공연장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워낙 넓은 공간이다 보니 오른쪽을 보는 동안 볼 수 없는 왼쪽과 정면의 장면이 아까워 연신 고개를 180도로 왔다 갔다 했다. 


저 천정 위에 걸쳐있는 천이 공연 시작과 함께 위로 빨려 올라간다


공연을 보는 내내 사진 찍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내 인생 공연으로 등극


어마무시한 높이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와이어줄만 지운다면 스크린도 없는데 눈앞에서 사람이 날아다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을 거다. 서커스라는 전통적인 공연 방식에서 생짜 몸으로 보여주는 특유의 컨셉만을 가져와, 이렇게 현대적 기술과 방식으로 변형시킨 시도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잘 찾아보면 우리도 과거의 것들을 재해석해서 공연의 소재로 삼을 게 많을 것 같단 생각을 해봤다. 물론 나 말고 어떤 천재들이 하겠지.


공연 막바지에 큰 충격을 먹은 것 하나. 군무를 추는 남자 배우 중 한 사람의 다리가 종아리쯤부터 의족이었다. 세상에나. 신경 써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너무나 힘차게 춤을 추던 그에게,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박수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계획에 없던 '카 쇼'마저 예약을 해버렸으니. 내가 언제 또 라스베이거스를 오겠어,라는 생각보다는 정말 쇼가 궁금하고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은 뭐, 밥 좀 굶으면 되지.


그림일기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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