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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06. 2023

[번외] 배낭 후원자님 전상서

미국, 라스베이거스

배낭 후원자님, 보세요.

이번 여행에서 우리 아이들을 맡아주고 계시는 임시 집사님과 맞먹으시는 일등 공신, 배낭 후원자님. 우선 문안인사 올리옵고 댁내 두루 평안하신지요? 


제가 이리 알랑방구를 뀌고 앉았는 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너무 충격받지 마시고 맘의 준비를 좀 하셨으면 해서요.

대륙을 넘나드는, 스케일 다른 여행을 하면서 제가 이 배낭을 얼마나 아꼈는지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이제와 고백하자면 리스본에서 코인 세탁소까지 찾아가 배낭 세탁을 한 건, 사실 포르투에서 만난 루아라는 캣초딩이 배낭에 오줌테러를 해서였어요. 그냥 때가 묻어,라고 일기에 적었던 걸 반성합니다. 후원자님도 제 페친이잖아요.


냄새 제거제를 들이부어 닦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세탁소까지 찾은 거랍니다. 무튼 그 이후로는 배낭이 아주 향기로워졌으니 이쯤에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유럽과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날아갔다 오면서도 무탈했던 배낭이, 미국땅을 밟으며 불안 불안하더니 급기야 오늘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맞닥뜨린 건, 빵꾸. 


이거 실화임?


미국에서 총 4번의 공항을 거쳤는데 한번도 빠짐없이 검색대 놈들이 배낭을 정말 헤집어 놓았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 많은 짐들을 욱여넣는 게 웬만한 테트리스 실력으로 되는 게 아닌데 말이죠. 검사를 한답시고 꺼냈다 도로 집어넣지를 못해서 어쩔 땐 신발이, 어쩔 땐 옷들이 배낭과 레인커버 경계에 있더랬죠.


수하물 벨트에서 나와 상봉한 배낭을 볼 때마다 기도 안 찼다지요. 공항 바닥에서 그 많은 짐을 다 꺼내고 다시 싸는 일을 매번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니 짐을 법에 따라 좀 뒤졌는데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 있어도 이해해. 법이 그래'라고 적힌 종이 쪼가리를 발견하죠. 이번엔 내 소중한 자물쇠까지 해 드셨지만 뭐 법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요. 햐아.


문제는 배낭 자체를 망가뜨린 오늘 같은 날은 정말 델타 항공 데스크를 부술 뻔했습니다. 내(아니, 후원자님의) 배낭을 비행기 바퀴에 달고선 착륙을 했는지 레인커버는 기름때로 온통 시커멓게 오염됐고 그 속에 든 배낭에 빵꾸까지 난 걸 발견했죠. 


처참한 몰골입니다. 제 처지와 비슷하긴 해요


딸랑 종이 쪼가리 하나 남겨두고 법대로 하라는 미국 놈들


인천에서 짐을 부칠 때 레인커버 지퍼가 닫히지 않아 임시로 테이프를 감아 보냈지만 그럼에도 멀쩡했던 배낭이 미국 공항 몇 번을 거치며 급기야 저리 된 것입니다. 이게 오늘이 처음이었으면 당장 델타 카운터로 달려갔을 텐데 조금씩 사람 피를 말리더니 결국 레인커버는 개판이 되고 배낭은 쓸려서 빵꾸가 나고 보조 고리는 끊어진 사태를 맞닥뜨린 거지요.


그래서 그냥 후원자님께 이실직고합니다. 


이 배낭을 데리고 실크로드를 가실 예정이라고요. 저를 짐꾼 중 하나로 데리고 가주세요. 싫으세요? 그렇다면 제가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새 배낭을 사드릴 테니, 실크로드는 그때 가시면 안 될까요?


넹? 00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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