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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05. 2023

[D+78] 호스트의 고양이를 잃어버렸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준비하며 내가 상상한 최악의 사고는 핸드폰 분실이다. 


개인정보 이런 거 다 떠나서 여행 동안의 사진과 기록들이 다 날아가는 거니 꿈에라도 일어날까 무서웠었다. 물론 아직 여행이 끝난 건 아니니 계속 조심해야겠지만 오늘, 핸드폰 분실보다 더 어마무시한 사고를 내가 일으켜버렸으니.


이른 아침 비행기라 크리스틴과는 어젯밤 마지막 인사를 나눴고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아침 거실에서 윈스턴과도 마음 아픈 작별 인사를 하며 드디어 미국에서의 마지막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고양이가 사는 숙소를 찾다 보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번화가가 아닌, 차로 20~30분 정도 떨어진 주택가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 호스트 '코라'는 오늘 자신의 일이 늦게 끝나니 셀프 체크인을 하고 들어오되 고양이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달라고 했다. 웬일로 이 집은 외출냥이들이 아닌가 보다.


 집 안에 들어오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내 동선을 쫒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었다. 2층에 마련된 내 방에 배낭만 던져놓고 숙소 탐방에 나섰다. 어허, 라스베이거스는 역시 다르네. 집 마당에 수영장이 있다니. 뻑뻑해서 잘 열리지 않는 거실문을 겨우 열고 잠깐 사진만 몇 장 찍을 거니 문을 닫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문제의 그 빡빡한 샤시문과 수영장


그때. 노란 털뭉치 하나가 내 발 사이를 스치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선샤인'이다. 자물쇠가 채워진 마당 뒷문과 벽의 틈 사이로 유유히 사라진 고양이. 세. 상. 에. 나


눈앞은 노래지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으나 일단 집 안에 있는 나머지 한 마리마저 나가게 할 순 없으니 안 닫히던 거실문을 겨우 닫고 현관문으로 돌진했다.


정말 미친년처럼 온 동네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선샤인의 이름을 불렀다. 차 밑에라도 있을까 길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 확인하고, 이런 나를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던 이웃 주민들에게도 '노란 고양이 한 마리 못 봤나요?' 물었으나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생각을 해야 한다. 


설사 내가 선샤인을 발견한다한들, 나한테 잡히기나 할 것인가. 다정하게 이름을 부른들 오늘 처음 본 나에게 다가오기나 할 것인가 말이다. 미국에도 고양이 탐정 같은 직업이 있을까?


일단 911이든 동물보호협회든 어디라도 SOS를 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선 고양이 실종 신고를 이런 곳에다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핸드폰이 필요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나오며 핸드폰을 집어 드는 순간.


닫힌 거실문 앞에서 얌전히 식빵을 굽고 있는 선샤인. 초인적인 힘으로 거실문을 다시 열었다.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내 발을 쓱 스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들어오는 이 노랑 뭉치를 보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모든 일이 숙소 도착 30~40분 만에 다 벌어진 일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코라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더니, 코라는 선샤인이 탈출 상습냥이긴 해도 늘 금방 돌아오는 아이라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이렇게 즉각 들어주시다니. 

하나님? 저 잭팟도 좀 터지게 해 주세요.


이리 귀여운 얼굴을 하고 날 천국과 지옥으로 한 번에 보내버린 선샤인


낯선 고양이 냄새가 나는 배낭 검문 중인 갤러. 제발 오줌테러만은 안된다


그나저나 슬롯머신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공항이라니


그림일기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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