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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04. 2023

[D+77] 채우려면 먼저 버려야 하는 이치

미국, 시애틀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시끄러운 배관 공사 소리에 잠을 깼다.


여행 와 잠 하나는 끝내주게 잘 잔다, 했었는데 웬일인지 요 며칠 새벽에 깨면 눈이 말똥말똥이다. 해 뜰 무렵 겨우 다시 잠이 들다보니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이제 와 시차 적응일 리는 없고, 한국 갈 날에 맞춰 벌써 몸이 준비 중인 건가. 


거실에서 만난 크리스틴에게 나 오늘 늦잠 잤어했더니 쿨한 크리스틴 왈, 왜 뭐 오늘 급한 일 있어? 란다. 백번 옳은 말. 늦잠의 부정적 의미는 '할 일'이 있을 때만 해당되는 거니깐.


온 집안의 수도꼭지들을 모조리 잠가버리기 직전에 겨우 양치질만 성공. 비가 부슬부슬 보다는 좀 많이 오는 터라 클램차우더를 먹으러 나가려던 계획은 잠시 미루고, 나와 같은 이유로 산책을 못 가고 있는 윈스턴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전 주인에게 아기가 생겼다는 이유로 2살경 보호소에 버려졌다는 윈스턴은 너무나 점잖고 애교 많은 고양이지만 식탐이 많다. 몇 년 전 외출 한번 했다가 2주가 넘도록 건넛집 차고에 갇혀 아사 직전에 구출이 된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먹을 거 앞에선 영혼도 팔 기세라는, 마음 짠해지는 스토리를 가진 윈스턴.


이런 일도 있었는데도 여전히 외출냥이로 키우는 게 걱정되지 않냐고 물으니 크리스틴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차에 치일까, 또 어디에 갇혀버릴까 걱정은 되지만 윈스턴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만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헤어지는 게 두려우면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냐고 되려 내게 묻는 크리스틴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DNA에 개인의 자유가 깊숙이 새겨져 있는 서양인들에겐, 동물의 자유도 엄격히 지켜줘야 할 삶의 방식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라는 결론을 상기할 뿐.


이 분홍분홍한 코가 많이 그리울 듯


아직도 우유가 좋은, 애기애기한 윈스턴

  



처음 짐을 쌀 때 보온이 되면서, 엉덩이도 가려주면서, 여차하면 버릴 수도 있는, 옷들 위주로 골라 가져왔었다. 두 달 동안 피부나 다름없었던 '보온 삼총사' 가디건과 니트, 수면 바지를 버리기로 했다. 이 셋이 짐에서 차지하는 부피도 만만치 않거니와 라스베이거스도 그렇고 남반구인 뉴질랜드도 한참 여름일 시기라 과감한 결정을 해버렸다.


경량 패딩과 목폴라 정도면 충분히 비상시를 대비할 수 있는 지역들이기도 하지만 가디건은 땟꿍물 천지고 니트는 보풀이 더 이상 봐주기 힘들 지경이고 수면바지는 살이 빠진 거 + 늘어난 고무줄 덕에 허리춤을 실로 꿰매 입고 있었으니.


안녕, 삼총사


버려야만 채울 수 있는 불변의 진리. 이렇게 여유 공간이 생긴 배낭을 처음 본다 


동고동락했던 이 삼총사들을 침대에 펼쳐놓고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자니, 지금까지 함께 싸워 온 전우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 같아 우울해진다. 이젠 무생물에게까지 감정이입이 되는 지경이라니.    


여행이 끝날 즈음엔 내 안의 나쁜 버릇들도 이렇게 버리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혼자 잘난 척

지가 제일 옳은 척

세상에서 제일 쎈 척

인생 다 산 척


부러질지언정 절대 타협은 없다는 이 근본 없는 똥고집들을 다 버릴 수만 있다면.


새로 태어나야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시애틀의 마지막 시간은 최애 장소에서. 빗 속에서 먹는 따뜻한 클램차우더는 최고의 행복


임시 집사님이 보내 온 내 아이들. 엄마는 잊어 먹은 게 분명해


그림일기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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