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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Jan 03. 2023

[D+76] 엿듣는 재미

미국, 시애틀

일요일에만 열린다는 '프리몬트 선데이 스트리트 마켓'을 다녀왔다. 


마켓이긴 해도 내 정보망에 없던 지역인데 이 집의 입양 총각 니콜라이가 강추해 준 곳이라 일요일인 오늘만 기다렸다. 구글 지도를 보니 근처에 산책로도 잘 되어 있고 소품 가게들도 많아 혼자 노는 즐거움이 가득할 곳이라 비록 비는 부슬부슬 내렸지만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나는 공공장소에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는 취미 중 하나가 바로 '남 얘기 엿듣기'다. 꿈이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면서 어쩌다 이런 해괴한(!) 취미가 생겼는지는 모른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핸드폰을 보기보다 멍하니 밖을 보거나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본의 아니게 옆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전화 통화가 들리면, 수화기 너머 사람의 대답을 혼자 상상하곤 한다.


여행 와 들르는 마켓은 이런 엿듣기 취미에 최적인 장소다. 물건을 사는 척, 가게를 찍는 척하며 옆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손님과 주인의 대화를 엿듣는다. 뭐, 투어 참여처럼 본전 뽑을 생각으로 초집중을 하는 건 아니고 대충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들어만 본다.


오늘의 엿듣기 놀이 시작은, 직접 만든 핫소스와 올리브 오일, 식초 등을 파는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와 젊은 아가씨였다. 이 집 핫소스 맛에 반해 여러 가지 맛을 산 아가씨가, 온라인 주문을 하려는지 홈페이지가 있는지 물었는데 할아버지는 잠시 정적. 그러다 이메일로 주소 보내주면 부쳐 줄게, 하신다. 귀여우셔라. 메일을 쓰시는 게 어디야.


 또 다른 반려동물용 간식을 파는 아저씨와 손님의 대화. 강아지 주인인 듯한 아가씨가 이거, 이거 중에 못 고르겠다며 주저하자 주인아저씨는 강아지를 여기 데리고 왔는지 물었다. 아가씨가 저쪽 주차장에 친구랑 있다고 대답하니 그럼 샘플이 있으니 여기로 데려와서 둘 중 잘 먹는 걸로 사가라고 말한다. 아저씨 장사 잘하시네.


프리몬트 선데이 스트리트 마켓


마켓은 엿듣기 놀이에 최적


스트리트가 아닌, 실내에서도 열리고 있는 빈티지 마켓


오랜만에 나에게도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케이프타운까지만 해도 지름신을 철벽방어하며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포틀랜드에서 무장해제가 되고 만 이후로는 그저 '아몰랑 폴더'가 자동 생성된다.


빈티지 가방 가게에서, 아주 아주 오래된 담요를 잘라 가방 몸체를 만들고 끈은 차량의 안전벨트로 만들었다는 가방을 발견하고 '어머 이건 사야 해' 모드 발동. 그리하여 시작된 아줌마와의 흥정. 


- 여기 때가 좀 묻었는데

- 빨면 지워져

-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려?

- 얼룩 지우는 걸로 한번 문지르고 세탁기에 넣으면 끝이야

- 음,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데 5불만 깎아주면 안 돼효??

- 안돼 안돼


그러나 결제된 영수증을 보니 5불을 깎아주셨다. 좋은 싸움이었다.


타코마의 보니가 그랬다. 빈티지의 매력은 '때'라고


시애틀도 이제 내일이면 마지막.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건 알겠지만 예전처럼 우와~! 라든가 에엥~? 이라든가 하는 리액션이 없어졌달까.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하는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이제 열흘 가량 있으면 인천엘 간다. 아니, 들른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다가 웃고 있는 나다. 


프리몬트 트롤. 시애틀은 유난히 흉물(!)이 명소인 경우가 있더라 


오늘도 열일하는 가게 간판들


오늘의 고양이 1


오늘의 고양이 2


강인지, 바다인지 프리몬트 브리지 아래의 풍광


그림일기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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