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가면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좀 다른 이유긴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도 장거리가 아닌 이상 차를 잘 가져나가지 않는데 특히 (경기도 주민이라) 서울 시내에 볼일이 있다면 꽉 막힌 도로에서 혼자 운전하는 게 싫어 거의 대부분 전철이나 버스를 탄다.
전철을 타면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버스를 타면 바깥으로 지나가는 낯선 풍경들이 재밌다. 가끔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기도 하니 난감할 때가 참 많은 취미긴 하다.
그동안 여행한 수많은 도시들 안에서도 늘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다녔는데 사람 구경하는 재미로 치자면 라스베이거스가 1등인 것 같다. 한국과 너무나 다른 문화 때문일 텐데 이런 식이다.
#1. 버스 안에서 옆에 앉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열심히 부리또를 드시고 계시길래 음료수도 없이 참 열심히도 드시네 했다. 그런데 버스가 멈추자 다 드신 은박 포장지를 재빨리 뭉치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문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너무 당당한 그 모습에 '흡'하며 소리 내 웃고 말았다.
#2. '나=힙합'이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흑인 총각이 버스를 탔다. 승객 중 한 명이던 백인 아저씨가 그의 나이키 운동화가 너무 멋있다며 난리난리.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도 덩달아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버스 안의 승객 절반쯤이 그의 신발만을 쳐다봤다.
#3. 멋진 운동화를 신었던 그 힙합 총각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가 서 있던 자리로 다른 흑인 총각이 오더니 문제의 그 신발을 어디에 가면 싸게 살 수 있는지, 자긴 나이키보다 리복이 좋다던지 하는 말을 시작했고 세 사람은 신발 하나로 대동단결되어 하세월 수다를 떨었다.
#4. 한 흑인 언니야가 한 손엔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한 손엔 츄파춥스를 들고 버스에 탔다. 열심히 사탕을 빨아먹더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탕은 뒤로 휙 던져버리고 바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멋진데??
밤늦게 돌아다닐 일이 잘 없다 보니 길을 걷다 본 라스베이거스의 간판들이 참 밋밋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 걸. 같은 장소를 밤에 갔더니 그 재미없던 간판들이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왜 라스베이거스를 밤의 도시라고 부르는지 바로 이해해 버렸다.
투어 가이드 아저씨 말에 따른면 이 도시의 휘황찬란한 LED 영상을 총책임지는 게 우리나라 기업이란다. 스트립 쪽은 삼성이 맡고 다운타운 쪽은 LG가 맡았다는데 이유인즉슨, 누군가 이 영상들을 진두지휘하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중구난방이 될 거라 그렇게 대행을 준 것이라 했다.
오늘은 프리몬트 거리의 전구쇼를 보러 갔는데 세상에나, 색감이, 색감이... 신기하게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 이것들을 영상으로 찍어서 볼 때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 거리 중간중간에는 밴드 공연도 있고 10대들의 댄스 버스킹도 있었다. 헐벗은 언니야들의 호객행위도 물론. 사람 많은 곳 딱 질색인 내가, 영상 보랴 간판 보랴 공연 보랴 이 거리를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지 모르겠다.
이왕 나온 거 미라지 호텔의 화산쇼와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까지 섭렵해 버렸다.
라스베이거스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드디어 히트텍과 목폴라를 벗고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을 느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