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밖에 없는 자매라 어릴 땐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터울이 얼마 지지 않아서인지 질풍노도의 10대 시절을 지나오며 성인이 된 후엔 서로 안부인사도 묻지 않는, 글자 그대로 남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내 핸드폰에 저장된 동생의 번호가 '이촌 관계'일까.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진즉에 독립해버린 나와 달리 지방 대학에 들어간 동생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취를 하며 주말이면 집엘 왔다.
그즈음 부모님의 사이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고 그 꼬락서니가 보기 싫었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대학시절 내내 명절마저도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동생의 소식은 엄마를 통해 잠깐씩 들을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잘 나가는 광고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아가던 동생은, 강아지 두 마리를 시작으로 어느 날부턴가 고양이들 한 두 마리를 집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말에 의하면 보호소 봉사활동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몸이 성치 않은 아이들을 데려온다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은 갑자기 고양이 용품을 파는 온라인 쇼핑몰의 사장님이 되었다. 뭐지? 대체 뭐지? 고양이가 뭐길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싸그리 리셋해 버릴 수 있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러는 이유가 너무 궁금했고 그럴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는지 너무 알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대면 대면했던 우리 사이가 어느 날 갑자기 '하이루~ 요즘 잘 살아?' 한다고 될 리도 없거니와 '너 요즘 뭐하고 사니?' 같은 무미건조한 내 말에도, 동생은 분명 '넌 요즘 생각이란 걸 하고 사니?'로 해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대화란 걸 이어가는 건 불가능했고 이것이, 우릴 남보다 더한 남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동생이 스태프까지 되어가며 봉사 활동을 한다는 길고양이 카페(온라인)에 그 아이가 가끔씩 글을 남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궁금함은 급기야 동생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고 어쩌다 발견하는 동생의 글로, 겨우 그 정도의 글로도 그동안 몰랐던 그 아이에 대한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늘상 날카롭게만 보이고 조용하던 동생에게 저런 유머감각이 있는 줄 몰랐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저렇게 전투적이 되는 줄도 몰랐다. 이제 그 카페를 들러보는 건 내 일상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고양이들의 구조 이야기도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고양이 남매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시장통에서 칠렐레 팔렐레 돌아다니다 구조되었다는데 임시 보호를 하신 분이 너무 착한 고양이들이라고 지어준 이름, '착돌이, 착순이' 남매. 하루에 한 번씩 요놈들 노는 모습을 보고 또 보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뽀시래기 시절의 노랭이와 깜장이 [출처:길냥이에게 손내밀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내가 고양이를 입양한다면 동생과 '대화'란 걸 좀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고양이를 핑계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긴 할 것 같았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세상 지 잘난 맛에 살던 언니라는 존재가, 야옹이 발톱을 자르다 피칠갑을 했다고 엉엉 울며 전화를 해대기 일쑤고 애기들의 이빨 몇 개를 방바닥에서 주웠는데 이제 이빨이 안 나면 어쩌냐고 대성통곡을 하고 '노랭이와 깜장이'라는 1차원적인 이름을 지어놓고 까르르 거리는 이런 사람이었다니.
우리는 어느새 고양이라는 한 개의 주제만으로도 제법 긴 시간 전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건 여전히 어색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동생은 초보 집사인 언니의 다양한 실수와 무식함에 피식이나마 웃어주었고, 우리는 조금씩 진짜 자매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고양이들이 내게로 와 3년쯤 되던 해, 이혼 후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엄마는 동생 집 근처에서 요양병원 생활을 시작했고 동생과 나에겐 고양이 외에 엄마라는 공통된 주제가 막 추가되던 때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차 내려갔다가 잠깐 동생의 얼굴을 보고 올라온 며칠 뒤,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동생이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너무 늦게 발견이 되면서 손을 쓸 수 없었다는 병원 의사의 연락이었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구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릴 정신도 없었다. 아픈 엄마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했기에 어쩌면 또 한 번의 장례를 치를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난 뒤 동생이 남긴 2마리의 강아지와 9마리의 고양이들에게도 나는 눈을 감아야 했다. 내 어깨엔 이미 너무 많은 짐들이 올려져 있었고 남겨진 아이들까지 얹힐, 더 이상의 공간은 없었다. 내 어깨에 올린 이 짐들로, 내 몸도 망가져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뒤 난 암환자가 되어 버렸다.
동생이 떠나고 3년 뒤 엄마도 내 곁을 떠났다. 그날은 6번째 항암 주사를 맞은 이틀 뒤, 어버이날이었다. 엄마는 내가 암환자라는 걸 모르고 가셨다. 둘째 딸을 먼저 보낸 것도 원통한데 하나 남은 큰 딸까지 암이라니. 항암을 하는 동안 엄마를 보러 갈 때면 늘 귀까지 덮는 겨울 모자를 쓰고 갔었다.
찾아온 조문객들이 상주보다 더 많이 우는 장례식이라니. 검은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민머리엔 알록달록 두건을 두른 상주라니. 그런 상주가 3일 내내 참 많이도 웃었다. 일가친척을 빼면 조문객들 모두가 내 지인들이었고, 조의금 정도 보내고 말수도 있었을 텐데 직접 찾아와 준 그들이 너무 반갑고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회사생활을 병행하며 악착같이 항암치료까지 마친 나는 1년 뒤 세계일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가진 마일리지의 일부가 유효기간 만료를 앞두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젠 떠나지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숙소는 에어비앤비 중에서 호스트와 함께 생활하며 방 하나를 빌려 쓰는 것으로 경비를 절감하기로 했다. 공간을 나눠 쓰게 되니 호스트가 여자면 좋겠다 싶어서 여기저기를 찾다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으니 바로 호스트가 집사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
그때부터 나는 일부러 고양이가 사는 집들로 숙소 리스트를 채워갔다. 이렇게 되자 이제 내 여행 목표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고양이를 주제로 동생과 대화를 나눴던 것처럼 이들 호스트들과도 수다 떨 주제가 생겼으니 말이다.
때마침 집에서 독립을 준비 중이던 한 친구를 기적처럼 소개받았고 그녀가 우리 집에 머물며 내 아이들의 임시 집사이자 이모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남아있던 가장 큰 걱정거리까지 해결이 되자 이제는 온 우주의 기운이 '떠나라'라고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내 자신에게 내가 주는 가장 큰 선물. 뒤돌아볼 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100일 동안 7개국 18개 도시를 돌며 하루에 한 개씩 일기를 쓰고 그림일기를 그렸다. 그것들을 지금에 와 꺼내보니 이 여행이, 이 여행을 통해 겪은 시간들이 결국 나도 내 인생을 리셋시켜 볼 용기를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