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스카이패스 보너스 항공권의 명칭이 '세계일주 항공권'이라 그렇지, 세계일주라 부르기엔 조금 지엽적이다. 유럽과 남아공, 미국과 뉴질랜드를 거쳐 돌아오는 약 100일간의 여정에서 체력을 고려하여 남미를 빼고, 언제든 쉽게 갈 수 있는 아시아를 뺀 뒤, 티켓 규정에 맞게 도중 체류지와 경유지를 정하고, 각 나라의 성수기를 피해 좌석이 있는 날짜를 완성시키기까지 꼬박 한 달이 소요됐다.
그리하여 오는 9월 인천 -> 비엔나를 시작으로 약 8만 km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티켓을 오늘 손에 쥐었다. 22만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 모든 여정은 비즈니스 좌석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니 약 2천만 원이 넘는다. 그제 평소 너무나 갖고 싶었던 '킬리 배낭'을 지인으로부터 협찬받았다. 쌩얼로 다닐 터라 눈썹 문신도 했다. 마음은 벌써 여행자다.
어딘가에 기록도 남기고 또 내 친구들이 나의 여행을 엿보고 싶을 것 같아 잠시 휴업 중이던 페북을 부활시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잘 따라오게들.
여행 시작, 208일 전이다.
정해진 룰에 따라, 엄청난 머리 굴림이 필요한 일정 짜기
[D-145] 전 일정 숙소 예약 완료
마음이, 생각이, 널을 뛴다. 내 인생에서 말도 안 되는 혹은 해선 안 되는 너무 엄청난 사고를 치고 있는 거 같아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대를 품었다가 망했다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한다. 밤새 머릿속에선 '이게 최선입니까?'를 무한 반복하며 생각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하지만 어쩌랴. 그냥 에라이, 하고 만다.
실은 난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자꾸 내 마음을 흔든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부러워만 할 뿐,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누구도 주지 않는다. 줄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 또 머릿속 '아몰랑 폴더'에 이런 생각들을 욱여넣고 꺼내보지 않기로 한다.
[D-129] 유서 초안을 만들다
뉴질랜드와 암스테르담의 테러, 보잉기의 추락, 남아공의 사이클론 상륙까지. 이번 여행, 유서 쓰고 간다...
[D-100] 드로잉 수업
출발까지 꼭 100일. 동굴 속에서 마늘만 먹으며 100일을 버티기로 이제 막 마음먹은 곰이 된 느낌이랄까...
드로잉 수업을 신청했다. 잘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잘 표현하는 그림, 보이는 그대로의 그림이 아니라 머리가 아는 대로의 그림을 그려 보기로. 그래도 그림은 그림이니 스케치북과 펜으로 선 연습에 몰두 중인데 핀터레스트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고 있다.
목표는 여행 중 그날의 추억을 그림일기로 기록해 보는 것. 그것들이 모이면 글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비록 연습의 연속이지만 이것 역시 아주 재미있는 작업이라, 요새는 크리스마스에 선물 한 보따리를 받고 뭐부터 풀어볼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 아이 같다. 평온하다.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 푹 빠졌다. 재작년에 그렇게나 많은 책을 내다 팔았고 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이제 돈 주고 책 살 일은 없을 거라 다짐했는데... 빌려서 읽던 책을 다섯 페이지만에 조용히 덮었다. 책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싶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서점으로 달려가 품에 안고 들어와 버렸다. 카피라이터 김민철의 책들과 함께 인생 책으로 등극. 여행을 좋아하든 아니든 일독을 열렬히 권함.
[D-52] 드로잉 수업 종강
8주간의 드로잉 수업이 끝났다. 가장 큰 수확이라면 '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서 일단 긋고 본다는 것. 아직까지는 '잘' 그린 그림이 더 좋아 보이는 건 맞지만 '못' 그린 그림이라도 '내' 그림을 좋아해 보는 걸로. 강사의 말대로 기술이 아닌 이야기에 집중하고 그림 자체가 아닌 그리는 행위를 좋아하고 그것이 목적이 되는 드로잉을 해보자. 기술은 자꾸 그리면 는다. 이게 진리다. 치유될 상처가 없어서인지 그림=치유 같은 건 멍는건가요 싶지만 내가 벌인 일 중에 이번 여행 결심 다음으로 제일 잘한 일인 듯! 주변인들에게 추천합니다. <드로잉 프렌즈>
여행 가서 내가 만들어 낼 저널 북이 벌써 두근거릴 정도로 기대되는데, 이 강좌의 소득은 자뻑이 확실하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닌, 내 그림을 사랑해 보는 걸로
[D-39] 임시 집사&식량 비축 완료
드디어 앞 숫자가 삼십대로 들어섰다. 즉 이제 한 달 남짓이면 떠난다는 말이고 정말이지 본격적으로 여행 준비(라지만 사실 떠나 있는 동안 처리되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90%쯤)에 돌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동안 굵직한 것들만 조금씩 해놓고 세세한 것들은 출발 한 달 전쯤부터 하겠다 맘먹었던지라 이제는 빼박으로 시작이다.
먼저 임시 집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다. 내 여행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맨 처음 맘먹게 해 준 친구를 해고(?)한 셈인데, 3개월간 두 집 살림을 하겠다는 그 친구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좌불안석이었다. 매일 출퇴근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집 살림이라니...
그리하여 디렉트로 알진 못해도 믿을 만한 친구의 지인이라면 그 또한 어떠하리 싶어서 알음알음 부탁을 했었다.
- 월세&관리비 걱정 없는 숙소 - 에어컨, 가습기, 공기청정기 완비 - 공원과 산책로 완비된 주변 환경 - 핫플 많은 신도시
그런데 로또를 맞은 것처럼 하늘에서 그야말로 뚝, 심지어 기대도 하지 않은 집사 '경력자' 분을 뫼시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난 분명 보았다. 그분 등 뒤의 날개를... 이리하여 난 정말 이 여행을 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5개월 간 내 새끼들 먹일 식량들과 화장실 모래들을 비축했다. 최근에 이렇게 큰 금액을 써 본 적이 없어 카드를 긁으며 후덜덜 거리긴 했지만 뭐 어차피 한국에 있어도 써야만 했던 돈이라 위로하며... 저녁을 굶었다.
[D-20] 나한테 왜 이러세요, 시리즈
- 가스레인지 점화 불량 - 에어컨 실외기 정지 - 세면대 배수관 막힘 - LH 직원의 말바꿈 - 림프부종, 거대 로봇 팔 - 테니스 엘보 - 주문한 캔 사료 안 쳐드심 - 자고 일어나면 들려오는 세계 곳곳의 총기 사건, 테러, 자연재해, 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