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으로 꼬르륵 빠져들기 직전, 내일 입장권 사는 데만도 하 세월 걸린다는 미술사 박물관을 가기로 맘먹었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오늘만 날인가 싶기도 했고 매주 목요일은 폐장시간이 저녁 9시까지라 어슬렁어슬렁 나가자 싶었다.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도 박물관 바로 옆이라 동선이랄 것도 없는 날이었다.
테라스에 앉아 그제 갔던 훈데르트바서의 집들에 색을 입히며 놀고 있자니 비비안이 커피를 마시겠냐며 말을 건다. 정신과 의사여서 그럴까? 이제 겨우 만난 지 3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그녀와의 수다가 참 편하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싱글 라이프는 어때, 라는 내 질문에 자분자분 풀어내는 그녀의 이야기.
"원래 나는 북유럽 문화가 좋았어. 디자인이나 사람들의 성격 모두. 그게 좋아서 노르웨이랑 핀란드에서 각각 1년을 살아보고 거기에 정착하려고 집이며 언어며 모든 준비를 했거든. 그러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돌아왔는데 그러고 다시 못 돌아갔어. 여동생은 스페인 남자랑 결혼해서 홍콩에서 살고 있기도 했고 이제 엄마는 혼자가 되었는데 엄마를 남겨두고 떠날 수 없더라고.
우리 엄만 참 별난 양반이야. 매번 스님을 찾아가서 '내 딸이 34살이나 먹도록 결혼을 안 해요. 언제쯤 결혼할까요?' 같은 걸 묻는데 스님이 '쉰은 넘어야 될 거다'라고 대답했다고 흥분해서 전화를 했더라고. 땡중이라고, 돈이 아깝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꼭 덧붙이시지. 넌 왜 결혼을 아직 안 해서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니?라고.
여자가 나이를 먹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신체적 나이가 들수록 아이에게 문제가 될 확률이 높잖아. (난자를 얼리지 그러니?) 우리 엄마랑 똑같은 소릴 하네! 내가 38살 정도까지 '라잇맨'을 못 만나면 그럴까 생각 중이야.
정신과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엄마 아빠 일을 도와서 부동산 관련 일을 잠깐 했었는데 행복하지가 않더라고. 뭔가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고 '사람의 기억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라는 말에 관심이 가서 뇌 연구를 시작했어. 특히 노인들의 치매를 보면서 그 소중한 기억을 잃는다는 게 너무 슬퍼. 언젠가 내 소유의 클리닉을 개업해서 환자들과 만나는 게 꿈이야."
독일어가 잘 안 되는 비비안의 엄마는 지금도 소일거리로 부동산 일을 하는데 가끔 '잠깐 기다려봐요, 내 딸아이가 와서 해결할 거예요' 하며 자기에게 전화를 건단다. 물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착한 딸이 되고 싶다는 비비안. 어제도 엄마를 만나러 나가는 길에 굽 있는 구두를 신었다가 엄마가 '파티가냐?' 할 것 같다고, 운동화로 바꿔 신고 나가는 걸 봤었다.
그렇게 내 얘기 자기 얘기하며 웃고 떠들었더니 어느새 점심시간. 첫날 내가 사 온 식재료들의 양을 보고 비비안은 깜놀했지만 벌써 절반 넘게 먹었다. 아마 여행 와 꼬박꼬박 집밥을 해 먹고 있는 나 같은 여행자를 본 적이 없어서겠지.
버터도 치즈도 벌써 반이나 해치웠다
그렇게 배까지 채운 뒤, 이젠 딱히 긴장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해진 트램을 타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마 대기줄이 많다던 리뷰는 성수기 얘기였나 보다. 도슨트 프로그램이 없다기에 오디오 가이드를 빌릴까 싶어 기웃거리니 담당하는 할아버지가 '한국어 가이드는 조작이 어려우니 영어를 빌리는 게 좋을 걸?' 하신다. 기계 가지고 버벅거리나 리슨 앤 케어플리로 힘드나 매한 가지다 싶어 그냥 맨 땅에 헤딩키로.
박물관 내 레스토랑의 스케일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모작 중인 화가 아줌마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옛날 호주 여행을 하며 미술관에서 만난 도슨트 자원봉사자 할머니가 그랬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알 수 없는 소품들을 보며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보면 그림 보는 재미가 달라질 거라고. 그 뒤로 미술관을 찾을 때면 그림 하나를 보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곤 했는데 오늘은 그림 속 고양이들만 찾으며 다녔다. 예알못은 이런 재미로 미술관을 찾는다.
명화 속 숨은 고양이 찾기 1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명화 속 숨은 고양이 찾기 2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에곤 실레 역시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뉘신지도 모르고 만났던, 그러나 그림 자체에 충격을 먹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이렇게 눈을 호강시키며 놀았더니 두 곳을 둘러보는데만 장장 7시간... 분명 아침엔 느긋했는데, 하루를 돌아보니 강행군인 건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