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 귀호강의 날

오스트리아, 비엔나

by 므스므

한번 깨긴 했어도 어젯밤 역시 양호하게 잘 잔 편인데...


문제는 아침 6~7시 정도면 눈이 떠지고 급한 일도 없으니 아무리 더 자보려고 맘을 먹어도 말똥말똥의 수치만 올라갈 뿐. 에잇, 하고 일어나 보지만 사실 할 일이 없다 보니 참으로 곤란하다.


그래서.

오늘은 비비안이 비엔나에서 '커피맛 제대로'라며 알려준 집 근처 카페에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가 버렸다. 커피에 대해선 맛알못이지만 호불호는 명확해서 신맛의 커피를 싫어하는데 다행히 내 입맛에 맞았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놓고 카페 문을 마주 보고 앉도록 된 1인용 의자와 테이블에 앉아 눈앞에 보이는 카페를 그렸다. 장장 2시간을...


드로잉 수업 시간에 강사가 가장 많이 예로 든 상황. 여행 가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저널 북 펼쳐, 그림 그리기. 여행 시작 나흘 만에 드디어 그 모든 것을 조합하여 '폼생폼사'를 실천 중이다.


커피.png 비비안의 강추 카페 @naber Kaffee




유심칩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루에 한 번씩 고민을 하다, 조만간 사게 된다면 어차피 30일짜리를 사야 하니 그냥 삽시다 하고, 시내 유심칩 가게를 두 군데나 들렀으나 국내용만 판매한단다. 더 검색해 볼 의지도 없다. 포르투갈로 넘어가 다시 도전해 보자.

또 한 번 목적지를 상실하면서 여긴 어디인가 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첫날 방황하며 걸었던 슈테판 대성당이 있는 메인 거리다. 시계를 보니 운 좋게도 성 페터 성당의 오르간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 유심칩으로 인해 시끄러웠던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성페테.png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씩은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성 페터 성당


한참을 앉아 있다 나오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엔나에 도착해 아직 한 번도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 비도 오겠다 눈에 띄는 가장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도대체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소스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멀쩡한 채소들을 소금 소태로 만들다니!! 김치를 저리기 위해 소금을 왕창 넣은 뒤 물에 헹구지 않은 배추를 먹는 느낌이랄까. 식당 가기가 무섭다.

음식.png 지금까지 내가 만든, 국적 불명의 집밥들




세계 여행이란 걸 떠나면서도 '버킷 리스트' 따위 없는 나였지만 이번 비엔나 여행에서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유서 깊은 성당 안에서 클래식 공연 감상해 보기. 몇 년 전 프라하를 여행하다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관악기들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웅장하고도 깊은 소리가, 성당 내부는 물론 내 몸 전체를 꽉 채우는 희한하고도 짜릿한 경험을 한 이후로 꼭 한번 다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엔나까지 왔으니 모차르트라면 더 좋았겠지만 여러 공연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레퀴엠' 뿐이다. 우울해지고 싶진 않으니 비발디 정도면 뭐 오케이.


IMG_8532.HEIC 아무나 찍어도 엽서 그림이 나온다 @까를 성당


와... 여행 와서 밤에 나간 적이 없으니 이런 분위기가 비엔나에 있다는 걸 몰랐다. 까를 성당이 위치한 Resselpark에 들어선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성당이 가진 조명으로 인해 밤하늘이 시릴 만큼 파랗다.


입구에서 와이셔츠부터 구두까지 올 블랙으로 맞춰 입은 옵빠야들이 생글거리며 관람객을 안내하더니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이건 또 신세계. SF영화 세트장인가. 말잇못의 연속. 남은 여행 경비 다 털어서 매일 오고 싶다.

IMG_8543.HEIC 성당 내부가 수리 중이었지만 비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까를 성당


돈 아끼려고 스탠딩 바로 윗단계 표를 샀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정중앙 복도 한복판에 앉은 덕에 무대와 일직선에서 공연을 봤다. 아무리 사계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해도 독주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저씨의 퍼포먼스가 유진박이나 해리급이었다. 탭댄스 추는 줄.


오늘은 귀와 눈이 모두 호강한 날!



그림04.jpg 그림일기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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