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 도시도 마지막이기에 트램의 종점에서 만났던, 그 왕자님의 별장에서 보내려 했다. 마침 공원 안에 있던 근사한 카페도 9월부터는 주말에만 오픈한다고 한 안내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불허. 오전엔 구름만 낀다던 일기예보는, 한국이나 여기나 틀리긴 매한가지. 우산 없이 다니기엔 신트라에서의 악몽이 떠오르기도 하고 레인코트를 입지 않는 한 좀 힘들 정도로 비가 내렸다. 그래서 갈까 말까 망설였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힌다는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의 책 냄새는 어느 곳이든 좋다
스웨덴어로 된 책들 사이에서 발견한 한국 소개 책자들
영어도 아니고 스웨덴어로 된 책들이(서점이라면 표지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었겠지만) 나란히 꽂혀 있는 건 외국인에겐 의미가 없다. 한 바퀴 돌고 이곳 주민들과 같이 책상에 앉아 밀린 그림일기를 그렸다.
이동이 있는 날과 극도로 피곤한 날 등등 하루 한 개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못 지켜 몇 페이지에 공백이 있던 터였다. 그 높던 자존감은 어디로 가고 점점 이상한 그림들만 쌓이고 있는 것 같아 살짝 괴로워질 지경이다. 특히 어제의 그 로봇 그림은 정말...
도시를 떠나기 전, 임시 집사님에게 항상 전하는 엽서
우체국에 들러 임시 집사님에게 엽서를 부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가 공동묘지 앞을 지나간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을 가면 매번 공동묘지를 들른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비도 오고 어둑어둑 해지는 걸 알면서도 버스에서 내렸다. 굉장히 넓은 공원이었고 관리는 아주 깔끔했으며 비석을 보며 내 특기인 상상 놀이 한 마당도 하고.
그렇게 산책을 하다 비석도 없는데 유난히 많은 꽃과 리본, 인형들로 장식된 무덤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딱 엿새를 살고 떠난 어느 아기의 무덤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이 사랑받았구나 아가야
그러다 문득 아이고 너란 인간도 참... 싶더라. 집 앞 지척에 엄마를 모셔 두고도 2년 동안 딱 한번 가놓고, 이 먼 타국에서 남의 무덤을 보겠다고 일부러 버스에서 내리다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인간일세, 하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철이 좀 드는 건가 싶기도 하다.
동생을 보낼 때도 엄마를 보낼 때도, 누군가를 먼저 보내본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느꼈을 죄책감과 후회를 나라고 왜 안 했을까. 내가 00를 했더라면, 내가 00를 해줬더라면, 내가 00라고 말했다면...
그런데 나는 억지로라도 그 '만약에의 굴레'에 빠지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나 같은 불효녀, 나 같은 언니가 아닌 세상 스윗한 딸과 언니였더라도 그 죄책감과 후회란 건 반드시 있을 테니깐.
일단 그 두 가지 감정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만약에의 굴레가 무한반복된다는 걸 알기도 했고 그건 내 자신을 좀 먹는 걸 넘어 어쩌면 죽음이란 걸 떠올릴 만큼의 강력한 감정이란 걸 알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엄마가 떠날 당시, 항암치료 중이라 내 스스로에게 더 독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회사일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기도 하다. 먹은 걸 모두 토해내고 마약성 진통제까지 먹어 가며 새벽 늦도록 일을 했었다. 그 '만약에'를 잊으려고 지독히도 나를 몰아붙였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예상 못한 순간에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난 그 감정이 후회로 이어지게 두지 않는다. 그때로 돌아간들,
이렇게 생겨먹은 내가 달라졌겠어?
이렇게 빨리 이별할 줄 내가 알았겠어?
이젠 만회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후회는 지극히 소모적일 뿐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이다. 그래서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선택이고, 내가 이 뭣 같은 내 인생을 살아내는 생존 방식인 것이다.
내일이면 이제 유럽의 마지막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도시마다 후회란 걸 백만 개쯤 흘리고 떠나지만 뭐 어때.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놀고 있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