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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Nov 08. 2022

[D+32] 난생처음, 한인민박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내가 아프리카에 오다니.


여행을 그렇게 다녔어도 언감생심인 나라 혹은 대륙이 몇 있다. 북유럽이 그랬고 남미가 그랬고 아프리카가 그랬다. 북유럽이나 남미는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가보겠지 싶었지만 아프리카는 정말 아니었다. 동네 산책 좋아하고 카페 좋아하는 나 같은 도시형 인간에게 치안이 불안한 아프리카는 치명적이란 이유였다.


이번 여행에 기간과 체력을 고려해 남미는 제외했지만 아프리카만은 이번이 아니면 정말 올 수 없을 곳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나마 치안과 환경이 좋다는 케이프타운을 선택한 것이다.


어젯밤 11시가 넘어 도착하는 비행편이라 심카드가 없는 나는 우버를 탈 수 없었다. 공항에서 심카드를 사고 환전을 하는 모험은 피하기로 했다. 아프리카 못 믿어.


그래서 정말 난생처음으로 한인 민박집을 선택했다. 공항 픽업 서비스가 포함된 숙소였고 아프리카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초긴장 상태가 될터라 한국인 얼굴이라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민박집 아들이라는 남자가 나를 픽업했다. 자기네 집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치안이 잘 된, 한마디로 부촌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혹시 숙소 근처에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있냐고 물으니 화들짝 놀란다. 버스도 없거니와 이곳에서 대중교통을 탈 생각은 하지도 말란다. 넵, 그러겠습니다!


심카드 없이 유럽 한 달을 버텼고, 심지어 스톡홀름은 캐시리스 지향 도시라 환전도 하지 않았었는데 여기선 노답. 우버 타려면 심카드 사야 하고 남은 유로화는 전부 랜드화로 바꾸기로 했다.  




내가 여행을 다니며 한인 민박집을 한번도 찾지 않았던 이유는 '굳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긴 여행을 다녀도 한식이 그립다거나 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민박집주인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정말 한국에서도 이런 밥상 받아보기 쉽지 않은데 싶은 깔끔한 상을 받고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방에 딸린 욕실이 내 방보다 크다. 아주머니 껌딱지 강아지 자두


이 먼 타국에서, 이런 아침밥상이라니


식사를 하는 동안 부엌에서 잔일을 하시던 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화를 좀 해보니 영락없는 중산층의 권사님(!) 느낌인데 아니나 다를까 거실 테이블에 성경책이 놓여있다. 이 보수적인(일 것 같은) 아주머니에게, 짧디 짧은 머리카락은 노랗고 손목과 목덜미엔 문신이 있고 캐리어가 아닌 배낭을 지고 온 이 여자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궁금해졌다.  


내가 첫인상으로 남을 판단하듯, 남들 눈엔 내가 어떻게 비칠까. 유럽에선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걸 보면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 어르신이기 때문인 듯.




오늘은 동네 구경이나 해보겠다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이 동네는 백인 거주지역이라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이건, 인도 자체가 아예 없는 동네라니! 차도 옆은 바로 누군가의 잔디 마당이다. 결국 찻길로 걷거나, 남의 집 마당을 밟으며 걸어야 했다.


인도가 아예없는 동네라니


일단 이 근처 산책은 포기. 구글맵을 보니 고속도로 아래쪽으로 카페도 있고 공원도 있길래 무작정 방향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무조건 고속도로를 건너야 한다. 응?


어딘가 분명 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터널(사람 다니는 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버스가 다니지 않는 이 동네로 일을 하러 '올라오는' 흑인들이 있을 테니, 분명 길은 있다고 믿었다. 내가 묵는 민박집에도 앳되 보이는 젊은 흑인 아가씨 하나가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유레카!

언덕길 끝 즈음 풀숲에서 사람이 다닌 흔적을 발견했다. 그 길을 통해 고속도로를 건너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무작정 구글맵의 주변 탐색을 통해 발견한, 가까운 카페가 목적지였는데 가보니 이런 주택가 한 복판에 예상치 못한 아늑한 카페라니. 인생에 하등 도움 될 건 아니나 나 산책운이 좀 있는 듯.


목표가 있을 때 내 집요함은 끝이 없다. 기어코 찾아낸 '길'


아담한 동네 카페


또다시 저녁으로 거나한 한식 밥상을 받으며, TV를 보고 계시던 주인아주머니 아저씨의 일상을 엿봤다. 20여 년 전 아들을 먼저 케이프타운으로 유학 보냈고 2년 뒤 자기네 부부도 뒤따라 들어와 이곳에 정착했다고 하는 두 분은, 영락없는 한국 노년의 부부였다. 한국발 뉴스를 보며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아주머니에게, 생각은 제발 속으로만 하라고 핀잔을 주는 아저씨. 말년을 함께 보내는 친구 같다.


나의 부모님은 왜 서로를 믿지 못했을까. 왜 두 사람은 서로를 좀 더 의지하지 못했을까. 답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싶어 씁쓸하다.


좀 전에 아주머니가 불러 나갔더니 남아공 맥주 맛을 보라며 흑맥주 한 병을 내미셨다. 음주 후 일기는 술주정이 되는구나. 여기까지.


내일은 일단 아주머니에게 돈을 꿔서 시내로 나가보는 걸로.


그림일기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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