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부산에서부터 인천과 방콕과 중동 어드메를 거쳐 도착한 부산 아가씨로, 덕분에 오늘 아침 우버 비용을 셰어 하기로 하고 함께 시내로 나갔다.
가장 번화가이고 안전하다는 '워터프런트'의 쇼핑몰 앞에 내려서 각자 쿨하게 갈길 가기. 씩씩하게 걸어가다가 삼보일사(세 걸음 걷고 사진 찍기)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슨 유체이탈 화법인가 싶다. 나도 시내는 첫 날인 주제에.
나는 지금, 가슴 벅찰 일보다 이곳에 머물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 심카드도 샀고 환전도 잘 마쳤다. 우버를 쓰는 것 외에 밖에서 데이터를 쓸 일이 없을 테니 일주일 동안 5백 메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득의양양하게 카페에 들어갔는데.
내 우버 앱은 어디로 간 것인가. 안 쓴다고 지웠네? 이 무슨... 앱 까는데만 180 메가를 썼다! 그런데 도통 로그인이 되질 않는다. 심카드를 구입한 가게에 다시 갔다. 영어로 언어 설정을 바꿔 자기에게 폰을 달라고 하길래, 내 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손님을 상대하는 그의 뒤를 졸졸졸졸 따라다녔다. 어찌어찌 로그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날씨 운이 좀 따라주려나
세상 제일 좋아하는 일, 맑은 날 야외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멍 때리기
번화가라 그런지 걷는 것에 큰 부담은 없다
워터프런트에서부터 중간중간 옆으로 새기도 하며 하세월 걸어 '남아프리카 국립 미술관'에 도착했다. 어느 나라를 가건 '국립' 이란 단어가 붙으면 평균 이상은 하기 마련인데, 입장료가 단돈 2500원일 때 알아봤어야 했다. 한 나라의 대표 미술관 앞 분수가, 썩은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는 걸 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무슨 의도의 전시 인지도 모르겠고 설명도 없다. 젠장.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1 @SA 국립미술관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2 @SA 국립미술관
생각보다 미술관을 빨리 나오는 바람에 무엇을 더 보고 들어갈까 고민하다, 구글맵으로 주변 탐색을 하니 오호, 근처에 영화관이 하나 있다. 정말 아담하고 소박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 없는 빈티지한 극장 공간. 어제 막 개봉한 <조커>가 10분 전에 시작을 했다. 어느 도시가 됐건 내 너를 반드시 보리라...
이런 곳에서 영화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the Labia theater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당당하게 우버에 접속을 했지만 이게 뭔가. 계속 '로딩 중' 메시지만 뜨고 아무리 기다려도 목적지를 잡지 못한다. 길에는 택시라곤 씨가 말랐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 와중에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핸드폰은 배터리가 20%에서 간당거리고. 맘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큰길로 나와 근처 건물의 안전요원 하나를 붙잡았다. 케이프타운에는 종종 자기 건물의 안전을 사설 경호원들에게 맡긴다는 얘기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내 상황을 들은 그는 도로까지 직접 나가더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떡하니 택시가 나타났다!!
이 기사양반, 내가 내민 주소를 보더니 일단 파킹부터 하고 찬찬히 좀 보잔다. 그러더니 택시에서 내려 나를 지나치고 아까 그 안전요원과 악수를 하더니 그에게 20 랜드 지폐를 건넨다. 심지어 두 사람은 통성명을 하고 핸드폰 번호까지 교환한다. 아, 나, 아프리카에서 원양어선에 팔리는구나, 1600원에.
정신 차리자. 전투 모드 장착할 타임이다. 드디어 택시에 탄 기사가 네비를 켜서 위치를 확인하는 걸 보고 일단은 안심. 택시비가 얼마나 나오겠냐 물었더니 속사포 같은 영어(라고는 하지만 네덜란드어+독일어가 섞인 아프리칸 영어)로 여기가 디게디게 멀어서 킬로미터당 얼마고 어쩌고 한다.
됐고, 출발하자 했다. 니가 바가지를 씌울 모양인데 함 두고 봅시다. 절대 돌아가지 못하게 나도 함께 네비를 보면서 왼쪽으로 빠져야 되네, 직직해야 할거야, 나 여기부터는 길 알아, 등등 내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어필했다. 그렇게 무사히 숙소 앞에 도착은 했으나.
문제는 내가 오늘 오전에 우버로 시내를 나갔었기 때문에 그 비용을 대충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버로 200 랜드를 냈었는데 이 놈이 450을 부른다. 속으로 300 정도까지는 주겠다 싶었는데 상상 이상이다. 못 내리게 할까 봐 이미 몸의 반은 택시 밖으로 꺼낸 상태.
이봐요 아저씨, 내가 300줄 게. 우버만큼 쳐주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1.5배 주겠다잖아
그러면 자긴 보스한테 죽는다(총에 맞는 장면을 잠깐 상상했다)며 380은 받아야 한단다. 속으로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렸다. 아침에 셰어를 했으니 혼자 나갔으면 왕복 400 이 들었을 것 에잇, 350에서 땡! 기사는 노노를 큰소리로 외쳤으나 이내 포기하는 제스처.
좋은 싸움이었다...
집에 들어와 아주머니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자니 팁을 주신다. 또 안되면 일단 가장 가까운 맥도널드에 들어가서 와이파이를 잡아요. 그렇구나. 심카드 필요 없었구나. 응. 그렇구나.
씩씩한 부산 아가씨는 맛집 찾아다니는 게 최고의 낙이라며,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겠다고 하여 나 혼자 밥상을 받았다. 오늘 저녁은 유튜브를 보다 꼬마김밥이 맛있어 보여서 뚝딱 하셨다며 삼겹살과 함께 내주셨다. 무뚝뚝한 남편과 아들뿐이라서일까. 아주머니는 나랑 수다 떠는 게 마냥 좋으신가 보다.
엄마 껌딱지인 몰티즈 강아지 '자두'가 행복하면 그만이시라더니 요즘 새롭게 생긴 취미가 유튜브에서 새끼 고양이 구조해서 돌보는 채널들 찾아보시는 거라는데. 말씀을 하시는 도중에도 연신 자두에게 삼겹살을 입에 넣어주신다. 둘 다 너무 귀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