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나의 DNA에 '느긋'이란 단어는 새겨져 있지 않다.
이건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 TV를 보면서도 핸드폰을 봐야 하고, 마트를 가야 하면 근처 도서관에도 꼭 볼 일을 만드는 사람이다. 내 어떤 행동 하나가 그 하나로만 끝맺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일을 할 때도 몇 가지를 묶어서 해야 하는데 보통의 경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한 대비가 주다. 지금 우리가 회의를 한 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어떤 대안이 있는가, 그 대안은 현실 가능성이 있는가 등등 내 밑에 있는 팀원들은 이런 내가 징글징글하단다. 인정.
그래서 나는 늘 일을 만들어서 하는 사람이고 그 계획대로 되게 하기 위해서 꼼꼼히 일정표를 짠다. 누가 시켜서 하면 못할 일이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선 체력이 예전의 내가 아니다. 배낭 하나 거뜬하게 매고 게스트하우스들을 전전하며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던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면 안 된다.
나는 암 발병 원인을, 유전적인 요인을 뺀다면 90% 이상 스트레스라고 믿는 사람이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경우만 하더라도 보통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더 많이' 하지 않던가. 나 역시 인생의 어퍼컷을 연타로 맞아댔으니 멀쩡할 리 없었던 거고.
이런 내 몸뚱이를 염두에 둔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느긋'이란 단어와 친해져야만 했다. 그런데 웬일로 이게 해보니 되더란 말이지. 하루에 한 곳만 보러 나가고, 어쩔 땐 아예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란 사람이 변한 줄 알았다. 변할 나이가 되기도 했지, 암.
착각이었다.
방문한 도시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고 그걸 공부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으니 뭘 알아야 기를 쓰고 가든지 말든지 하지. 그저 호스트들이 알려주는 몇 개의 정보만으로도, 그 몇 개를 가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치 '여행 할당량'을 채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뉴욕은 달랐다. 난 이 도시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몇 가지는 포기하자,라고 하기엔 시간도 많다. 그래, 한 도시쯤 느긋하지 않으면 어때. 좀 힘들어도 다 가고 다 해볼 테야.
아침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장을 시도했다 실패했다. 이 얘기는 내일 다시 하기로.
정줄을 챙기고 일정을 변경해 향한 곳은 '첼시 마켓'. 내가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길을 걷다 발견한 광고판에서 오늘부터 주말까지 '첼시 필름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켓도 있고 페스티벌도 있다니 일타쌍피잖아.
하지만 마켓에 도착해서 알았다. 내일 와 볼 생각으로 집에서 검색을 1도 안 해보고 왔다는 걸. 그러니 도대체 페스티벌이 어디에서 열리는지 알 수가 없다.
심카드를 사긴 샀다. JFK공항에서 10만 원쯤 하던 심카드가 시내에서는 4만 원 정도길래 냉큼 샀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 체류가 45일가량인데 30일짜리를 산 터라 우버가 가장 필요해 보이는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일단 구입은 하되 개통은 뒤로 미뤄뒀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구글맵을 제외하고 길거리에 서서는 인터넷 검색을 할 수가 없다. 뭐 어쩌겠나. 이왕 온 거 맛있는 거나 먹읍시다에 꽂혀 비싼 랍스터를 시켰다. 주문에 10초, 대기에 5분, 랍스터 흡입에 5분, 끝. 눈앞에서 5만 원이 넘는 랍스터가 그렇게 사라졌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911 메모리얼 뮤지엄'.
남의 나라의 비극적 사고,라고만 치부하기엔 3천여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을 떠나보낸 나머지 가족들의 고통과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사고 직전의 시간을 분 단위로 나눠, 희생자 혹은 목격자의 육성과 사진 자료들로 현실감을 전하고 전시 후반에는 알카에다를 소탕하기까지의 여정도 상세히 전시해 두었다.
뮤지엄 입장 전 쌍둥이 빌딩이 있던 옛 자리에 설치된 '911 Memorial Pools'가 인상적이었다. 풀 한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이유는 희생자들의 부재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슬픔(물)이란 걸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보다 저 적확히 보여줄 수 있을까.
뮤지엄 건물 자체가 사고의 잔해들로 기본 뼈대를 만들어 둔터라 당시의 충격과 안타까움을 더 극대화시켜 준다. 아무 정보 없이 이 공간에 들어섰다면 영락없는 영화 세트장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 뮤지엄의 스토리텔링은 결국 '미국의 위대함과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이 끔찍하고 무서운 공간을 어떤 식으로 탈바꿈시켰는지는, Rebirth란 이름으로 진행한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겨뒀다.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까지 적어놓은 걸 보면서는 솔직히 전형적인 미국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유독 남자들이) 코를 훌쩍거렸고, 희생자들의 마지막 실제 육성과 가족과 친구들이 그들의 음성사서함에 남긴 안부를 묻는 음성자료들을 들을 땐 나도 울컥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로, 미국은 과연 더 안전한 나라가 되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