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보고 싶은 곳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다던 뉴욕인데.
체류 후반부에 접어들며 돌이켜 보면, 하루에 한 곳 아니면 두 곳을 갔다. 문제는 그 한 두 곳에서의 체류 시간이 앉지도 못한 채 평균 3~4시간이었고 심지어 어제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6시간을 걷다 나왔다.
이러니 난 분명 하루에 한 두 가지만 했는데 집에 오면 완전 넉다운이 되어버려 일기고 자시고 쓰러져 자기 바쁘다. 그래서 지금 아침 10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집에서 빈둥거리며 어제 못 쓴 일기를 쓴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나는 과연 가열찬 관광객인가, 아니면 느긋한 관광객인가.
고양이들과 놀아주며 아침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뮤지엄 오브 무빙 이미지'를 가보기로 했다. 영화 박물관쯤 되는 곳인데 영화 관련 희귀 자료와 영상물들을 볼 수 있다니 취향저격이다. 하지만 한 순간의 착각으로 버스를 잘못 타면서 30분이면 갈 곳을 한 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했다. 오늘 일진이 하 수상하다.
뮤지엄의 전시는 크게 2가지. 하나는 '짐 핸슨'이라는, 우리에겐 <세서미 스트리트>로 잘 알려진 인형 제작자의 작업물 전시로 추억 돋는 인형들 보는 재미가 있었고 또 하나는 '비하인드 더 스크린'이란 이름으로 영화 현장의 각 파트들을 전시&체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영화진흥위원회와 함께 '영화 용어 DB 현대화 작업'을 하고 와서인지 각 파트들이 어찌나 친근해 보이던지.
체험형 뮤지엄이니 (놀랍지도 않게) 이곳에서 또 3시간가량을 혼자 신나게 놀았다.
뮤지엄을 나오며 여기서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꼭 '코니 아일랜드'를 가보자 했다. 미국 문학에 자주 등장하고 유명 가수가 뮤비를 찍었고 해도 나에게 코니 아일랜드는 그저 영화 <빅>의 포춘 텔러 기계가 있는 곳으로 기억된다. 늦은 점심도 먹고 바닷가도 어슬렁거리다 카페에나 들어가 그림이나 그리면 딱일 것 같았는데.
주말인 뉴욕의 이해 안 되는,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망할 지하철 시스템. 예를 들면 이런 식. 2호선만 서는 전철역에 3호선이 들어오길래 (이해는 안되지만) 어차피 저것도 가니 타자했는데, 얼라, 정차역들은 4호선 역들이다. 지하철을 타기 전 분명 기차 몸통에도 3호선이라 쓰여있었는데. 이거 뭥미요?
게다가 갑자기 승객 하나가 쓰러졌다며 구급요원들이 올 때까지 30분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 하여 지하철로 1시간 정도면 갈 곳을 2시간 반이나 걸려 갔고, 도착해 보니 난 점심도 굶은 채였으며 이젠 석양을 봐야 할 판이 되었다.
바닷바람은 또 어찌나 쎄던지. 뉴욕의 밤 날씨가 감당이 안되어 어제 비니 하나를 장만하고 좋아라 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포춘 텔러는 고사하고 숙소까지 하세월 걸려 갈 생각에 열까지 오르더니 목이 아예 잠겨버렸다. 어제의 강행군과 투어 버스를 기다리며 밤거리에 서 있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숙소에 도착해 뜨끈한 수프 한 사발과 감기약을 저녁으로 챙겨 먹었는데 다니엘의 엄마가 당근케이크를 구웠다며 주신다. 너무 맛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한 조각을 더 얻어먹으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냐 물었더니 핀터레스트에서 본거라고 쿨하게 답하는 뉴요커 할머니.
이곳 뉴욕의 호스트 다니엘을 오늘까지 딱 두 번, 그것도 5분도 채 안되게 만났었다.
그녀의 가족 모두가 2층에서 생활하고 1층의 부엌만 게스트와 나눠 쓰는데, 워킹맘인 다니엘과는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다. 마주쳤다 해도 아기 돌보고 집안일 정리하느라 너무 바빠 보여 말 걸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거실과 부엌 모두가 애기 용품으로 가득 차 있어 딱히 앉을자리조차 없다.
부엌에 있는 식탁이 고시원 책상보다 작고 하나 있는 소파는 아기의 짐(영성체를 앞두고 선물이 무진장 들어왔다고)에 점령당했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늘 마키엘라와 함께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은 주요 포인트에 cctv 가 달린 집이라 결국 하루 종일 좀 쉬고 싶어도 내 방 외에는 쉴 만한 곳이 없다.
호스트와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걸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데 다음 여정인 시카고에서 날아온 비보. 호스트 부부가 내 도착 날, 코스타리카로 일주일 휴가를 간다네. 이래저래 미국이 나에게 불친절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베베 이 녀석은 이제 잠까지 나랑 잘 모양. 내 방에서 나갈 생각이 아예 없는 듯. 그래라. 감기약도 먹었겠다 핫팩이다 생각하고 껴안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