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
감기에 걸리며 천식이 함께 찾아왔는데, 설마 하는 안일함으로 한국에서 흡입기를 챙겨 오지 않았다. 방 안의 온도를 올려주는 유일한 난방기가 팬히터인데 이 뜨거운 바람으로 인해 방안 공기가 어마어마하게 건조해진다. 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덮고 있으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 말라버릴 정도다.
숨소리에서 무슨 SF영화의 괴물 사운드가 들린다. 누워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벽 사이 모서리에 기대앉아 잤다. 아니 앉아서 밤을 새웠다.
히터를 끄면 방이 너무 춥고, 잠을 잘 수도 없고, 거실에 나가 있을 수도 없으니 결국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야만 했다. 죽기야 하겠나.
여행을 하며 가고 싶은 장소를 정할 때 나는 2가지 정도의 기준이 있다.
내가 여길 또 언제 오겠냐 싶어서 보이는 장소가 있고, 일단 가보자 싶어서 가는 장소가 있다. 구겐하임과 메트, 코니 아일랜드가 첫 번째 기준에 따라 선택한 곳이라면 오늘처럼(혹은 뉴욕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처럼) 동네 이름 하나 믿고 그냥 가본 '브루클린'이 두 번째 기준에 해당된다.
원래라면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린다기에 겸사겸사 시장 구경도 하고 브루클린 다리도 걸어서 건너볼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몸상태로는 '여행자 모드'는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일단 도착한 브루클린에서 간단한 브런치를 먹으며 구글맵으로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어디 괜찮은(따뜻한) 카페가 있다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내 눈에 들어온, '브루클린 아트 라이브러리'. 도서관이라고? 게다가 아트라니 그림책이나 실컷 구경하자 싶어서 찾은 그곳은 완전히 내 예상을 벗어난, 아주 흥미로운 곳이었다.
이곳에서만 파는 얇은 스케치북 키트(B5 정도 사이즈의 작은 스케치북과 우편 봉투)를 구입해, 어떤 기법이든 어떤 재료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그림으로 이 스케치북을 채운 뒤 다시 이곳으로 보내면 된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날아온 스케치북들이 바로 이 도서관의 소장품이 되는 것이다.
방문객들은 관심 키워드를 이용해 검색을 한 뒤 사서에게 보고 싶은 스케치북을 '대출 신청'하면 책장에서 바로 꺼내 준다. 한 번에 여러 권을 신청할 순 없고 딱 2권씩만 되는 데다 대출이라고 해서 집에 가져갈 수는 없다.(당연하지, 세상에 딱 한 권뿐인 스케치북이니)
이 많은 스케치북들 중에서 한국에서 온 작품도 있나 싶어 '한국'이란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는데 연관된 사람 중에 나랑 이름이 같은 아티스트가 있길래 신청해 봤다. 이 사람 환자다. 스케치북 내지를 다 뜯어내고 플립북처럼 데코를 했는데 이 모든 종이에 바느질을 해놨다...
뉴욕이란 도시를 살펴볼수록 왜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찾는지, 왜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공부를 하러 오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예알못인 내가 봐도 도시 곳곳에서 영감이란 것이 안 떠오를 수가 없다. 이 도서관만 해도 그렇다. 관광이 아니라 그저 살아보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 찰 것만 같은 곳. 그게 뉴욕이란 도시의 대체 불가 색깔이 아닐까.
허락받은 스케치북들에 한해 디지털 작업도 진행해 뒀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번 들어가 봐도 좋을 듯.
https://www.sketchbookproject.com/
밖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몸도 안 좋은데 굳이 어딘가 또 찾아가긴 그래서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저널과 필통을 챙겨 나온 거 보면 이미 오늘의 일정은 정해져 있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