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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Nov 28. 2022

[D+53] (1) 드디어 시카고 탈출

미국, 시카고

이 집에 도착하던 날, 중국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청년 하나가 문을 열어줬었다.


호스트 데이비드 대신 농장과 게스트를 관리해 주는 조쉬가 마침 출타 중이라 이 친구가 집 안내를 해줬다. 서로 그렇게 한참을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btw 난 한국에서 온 므스므 라고 해 라니,


 - 뭐라꼬요? 한국 사람이셨써요?


라는 걸쭉한 대구 사투리가...


나는 '완전 깊숙한 시카고 주택가의 이런 하숙집'에 한국인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그는 '완전 깊숙한 시카고 주택가의 이런 에어비앤비'에 한국인이 찾아오리라곤 눈곱만큼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로 국적조차 묻지 않은 채 영어를 쓴 거다. 둘 다 한참을 웃었다.


이제 22살이라는 이 청년은 학부에서 화학과 생명공학을 복수 전공했는데 교수님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 했다. 지금은 학교를 휴학하고 일단 영어를 배우러 온 것이란다.


내 처참한 몰골에 급한 대로 자기가 먹던 감기약이라도 먹으라며 건네주고 라면 드릴까요, 김치 드릴까요 하며 살갑게 구는 게 너무 고마워서 엊저녁은 내가 대접을 했었다. 대접 이래 봤자 어느 도시 건 마지막 날 늘 그렇듯 남은 야채와 고기를 때려 넣은 스파게티가 메뉴다.


하지만 정말 그동안 뭘 먹고 살았길래 거의 울면서 한 그릇을 뚝딱하고, 포도 씻어둔 게 남았길래 나중에 먹으라니 정말 90도로 인사를 하며 고마워했다. 맘이 짠했다.


세상엔 참 별 것 아닌 요리법들이 많은데 이 나이대 남자아이들에게 '뚝딱'이란 라면 말곤 없나 보다. 엄마 나이가 나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던데, 하물며 내가 이럴진대 진짜 엄마가 알면 맘이 찢어지겠다 싶다.


아들 가진 페친님들, 아들내미들 꼭 기본 요리 하나씩은 가르쳐요. 그다음 응용은 각자의 능력대로 하겠죠?




저녁을 먹으며 알게 된 호스트 데이비드 부부에 대한 이야기.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부부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사서 집 앞에서 홈리스들에게 나눠주는 이벤트를 하는데 점점 변해가는 홈리스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놀라웠다고 했다. 이 동네가 시카고에서 제일 위험한 동네 Top 10에 든다는 말에, 첫날 내가 봤던 이웃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는 처음 와서 한 달쯤 뒤에 자다가 총소리를 들었는데 경찰 한 부대가 와 있는 걸 보고 룸메이트와 함께 집을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단다. 그런데 이 두 부부의 따뜻함을 겪고 나니 절대 다른 곳에서 이런 사람들 못 만나겠다는 생각에 그냥 눌러앉아 버렸다고.


데이비드가 스탠리의 문제를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병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저도 이상하단다. 아마 병원비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는데 내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 하지만 홈리스 줄 음식값으로 병원비를...이라고 잠시 생각했으나 틀린 게 아니라 다름 때문이야, 라는 주문만 계속 외워댔다.


매일 아침 농장의 닭들이 낳은 달걀로


마지막으로 해 먹은 달걀 프라이




이제 오늘부터 타게 되는 모든 비행기는, 세계일주 항공권에 포함된 비즈니스 좌석이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지만 아침에 특히 적막이 감도는 그 집에 있을 이유가 없어 좀 일찍 집을 나섰다. 라운지에서 아침도 챙기고 커피도 마시고 하면 여유롭겠다 생각했다.


공항은 미어터졌지만 비즈니스 좌석의 특권으로 프라이어리티 라인을 따라 쭉쭉 밀리지 않고 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델타 스카이 클럽 라운지 입구에서 절망을 하고 말았으니. 라운지 이용은, 당일 국제선과 연결된 경우만 가능하단다. 그 외는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들고 있다 해도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한다고.


이 말인즉슨 만약 미국 내 모든 공항 라운지가 이런 시스템이라면, 앞으로 남아있는 여정동안 무료 라운지 이용은 불가하다는 뜻이다. 전부 국내선이므로. 특히 오늘 스케줄은 시애틀을 경유해 포틀랜드로 들어가는 건데 장장 4시간을 경유지에서 보내야 하지만 공짜 라운지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


그럼 플러스마일 카드(스톡홀름에서 망했던)로 갈 수 있는 라운지 키 카드는 어떤가. 10월엔 아직 쓰지 않은 1번의 기회가 있잖은가. 그렇다. 이 역시 국제선에만 해당이 된단다.


망할 항공사&카드사 놈들, 머리 좋은 거 봐... 제일 많은 티켓을 미국 땅에서 끊었는데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곤 이코노미보다 조금 더 넓은 의자(전부 국내선이라 비행기 자체가 크지도 않다)가 다라니...


나, 다리 짧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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