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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Nov 29. 2022

[D+54] 우연과 우연에 우연이

미국, 포틀랜드

나는 친구 관계의 카테고리가 리셋된 사람이다.


서울로 대학을 오며 중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절친 J(포르투 편에 등장했던)를 빼곤 전혀 교류가 없고, 대학교 혹은 대학원 동기들은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는 몇몇의 열심당원이 지금까지도 나를 그들의 무리에 끼워주는 덕에 안부나 묻는 수준이지 얼굴을 보는 건 몇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다.


그렇다면 나는 친구가 없는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친구의 정의에 부합하는 주변인들의 면면은 모조리 일하다 만난 사이다.


오랜 세월, 개봉 영화의 홍보 마케팅을 하다 보니 대부분 제작사와 투자사의 마케팅 담당자거나 배우 매니저거나 같은 일을 해 온 동료거나. 그중에서도 영화 기자들과의 관계가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보면 서로의 니즈(기자는 글감, 나는 홍보)가 있으니 연락도 자주 하고 그러다 촬영 현장이라도 1박 2일 정도 가게 되면 정말 급 친해지게 된다. 특히 한달 혹은 한주 간격으로 마감을 앞두고 밤을 새우는 영화 잡지 편집국으로, 홍보를 핑계로 (법카를 신나게 긁으며) 커피나 케이크 배달을 가며 사심을 채우곤 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땐 막내였던 신입 기자들이, 팀장이 되고 편집장이 되는 모습을 지켜봤고 내가 홍보일을 그만둔 지금은 기자와 홍보맨 사이가 아니라 그냥 친구들이 되었다. 횟수로만 보자면 거의 20년 가까이 된 친구 사이.


요즘은 영화 잡지 시장이 거의 무너져버렸고 미디어 환경이 변해버려 대부분 프리랜서 기자 혹은 작가로 활동하는데 이들 중 10년 넘게 알고 지낸 E가, 오늘 친구들과 함께 이곳 포틀랜드로 들어왔다.


여행 시작 전 주변인들에게 내 여정과 동선을 모두 알려주고 어느 도시가 됐든 한번 마주쳐 봅시다, 하며 기대치 0%의 농담을 던졌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다니. 그녀와 일행들(재밌는 사실은 E의 친구들도 서로 일로 만나 절친이 된 사이라는 거)은 시애틀과 포틀랜드를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여행하는 일정 중에, 여러 개의 우연과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낸 환상의 타이밍으로 나와 마주쳤다.


컨디션 난조의 원인이 가장 크겠지만 여행 중 내 사전엔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집에 가고 싶다'란 문장을 떠올릴 만큼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요 며칠인데. 한국말로 떠드는 수다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도 동갑내기 여행 친구들의 왁자지껄한 케미를 보는 재미가 너무 커서 정말 많이 웃었다.




오늘은 주말이었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날이라 시장 구경 생각에 신이 났다. E의 일행들과 포틀랜더 농부들이 만든, 갓 구워낸 피자와 샐러드로 점심을 먹고(내 것 아닌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이런 귀한 기회라니) 다운타운 산책을 시작했다. 발 길 닿는 대로, 라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 것이다.


그러다 시차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들은 숙소에서 잠깐 쉬기로 했고, 함께 저녁을 먹기 전까지 5시간가량 난 뭘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내 눈에 들어온 거대한 간판 하나.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서점이라는, 자부심 가득한 '파웰 북스'가 이들의 숙소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혼자 놀기에 서점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게다가 이곳은 단순히 서점이라 부르기엔 그 카테고리가 너무 다양하고 어마어마해서 그냥 정줄을(시간 개념을) 놓아 버리기에 최적인 곳이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다라는 개념이 얼마나 협소한 정의일 수 있는지 온 몸으로 보여주는 곳. 중고책들은 물론 너무나 사고 싶게 만드는 다양한 굿즈들, 그리고 포틀랜드 지역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을 만날 수 있고 낭독회나 저자 사인회 같은 이벤트도 수시로 열리는 곳.


이곳저곳 배회하다 한국 서적 코너에서 한국 문화에 대해 집필해 놓은 책 하나를 발견했는데 200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파행으로 치달았었던 당시의 상황을,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까지 적어놓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오는 걸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E의 일행들과 만날 시간이다. 오늘 저녁은 트립어드바이저 1등 식당 가기. 이들은 다 계획이 있었고 외로웠던 여행자는 그저 이들의 계획에 묻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미국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으로 즐거웠던 하루를 보냈다.


포틀랜드의 가을이란


동갑내기 절친들의 케미란, 저 세상 텐션임을 이 셋을 보고 알았다


지역 농부들이 직접 키운 농산물들을 주말마다 만날 수 있다


보통 신뢰를 위해 생산자의 얼굴 사진을 내다거는데 이건 제대로일세


핼러윈이라 호박 콘테스트가 열렸는데, 숙취에 시달리는 호박이라니


동행이 있다는 건, 맛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다 맛볼 수 있는 행복함과 동의어


정줄 놓고 놀기에 딱인 서점


책이며 굿즈며 볼 게 너무 많은 곳이다


나의 최애 만화들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해, 특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책


저자는 한국 특파원이었을까? 정보력이 대단한 걸


책에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 누군가 몰래 오려간 걸까, 아니면 오려진 책을 싸게 판 걸까


이러고 노는 친구들. 어찌 아니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림일기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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