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포틀랜드
#1
이제 이 지긋지긋했던 감기는 끝이 보인다.
하지만 당췌 유머 감각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 오늘도 버스를 기다리다 바로 옆 건물의 좁은 창틀 위에서 다리가 하나뿐인 까만색 새가 앉아서 졸고 있는 걸 봤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낙엽이 굴러만 가도 깔깔댄다는 10대들과 반대로, 별개 다 슬프고 속상하다.
그런데 갑자기 잠에서 깬 그 새가 똥을 찍, 싸고는 날아갔다. 그것도 두 다리를 하고.
[야생 조류가 한쪽 다리를 들고 쉬는 이유는 몸의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네이버 지식인이 친절히 알려준다.
아놔. 너도 추웠냐, 나도 춥다.
#2
E의 일행들이 나에게 남기고 떠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지름신.
포틀랜드는 소비세가 면제되는 도시라서 무언가를 사야 한다면 바로 여기야, 를 외치더니 일행 중 하나는 애플 워치를 사버렸다. 내 성격상 지른다는 표현을 쓸만한 비싼 제품엔 관심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여행 경비에 쇼핑 항목은 아예 없던 카테고리라, 소소한 것들이 모여 눈덩이가 되어가는 중이었으니.
여행자에게 '여기 아니면 못 산다, 나중에 돌아가서 후회한다' 같은 지름신의 속삭임에 반기를 드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질 걸 뻔히 알면서도 갖고 싶은 물건 앞에서는 매번 힘겨운 싸움을 한다. 특히 완전히 내 취향인데 가격까지 착하다면 이 싸움에 걸리는 시간은 그냥, 없다.
질러놓은 물건들을 숙소 침대 위에 펼쳐놓고 '이뻐, 너무 이뻐, 잘 샀어, 완전 잘 샀어'하면서 스스로 므흣해하면 그걸로 된 거다. 지름신과의 싸움에서 완패했는데도 왠지 웃게 되는 것이다.
그래. 졌지만, 잘 싸웠다. (근데 싸우긴 한걸... 까?)
#3
커피의 도시까지 와서 아직까지 제대로 된 '유명' 커피숍을 못 갔다.
첫 번째 이유는 집을 나서는 시간이 점심 즈음이다 보니 밤잠 설칠까 무서워 아예 커피를 안 마시니 못 가고 두 번째 이유는 커피를 좋아는 하지만 맛의 차이를 잘 모르는지라 뭘 굳이 거기까지 찾아가나 싶어서다. 맥도널드 커피와 스타벅스 커피 맛 정도는 구분하지만 커피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커피 애호가들에게 돌 맞을 소리지만) 정도라 포틀랜드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 지경이다.
특히나 미국에 도착한 이후로는 집에 커피를 가지고 있는 호스트를 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뉴욕도 시카고도 호스트들을 거의 못 봤으니.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부터 찾는 나이기에 뉴욕에서 인스턴트커피 한 병을 구입했었다. 포틀랜드에 와서, 그것도 이리 오래 머물며, 인스턴트커피나 마시고 있는 나란 인간 참.
그래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은 일찍 나가 모닝커피 함 해보는 걸로.
#4
어제 다녀온 SE 구역이 너무나 내 취향이었던 터라 딴 동네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옆동네인 Alberta Arts District 방문. 역시나 오늘도 무한반복, 상점 들락날락거리기.
구경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지만, 구경만 했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