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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Dec 05. 2022

[D+59] Keep Portland Weird

미국, 포틀랜드

아침부터 방 밖이 어수선하길래 나가보니.


치킨 삼총사 중 하나인 '에델'이 죽었단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카일라 말에 의하면, 며칠 전부터 에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 아침 병원을 데려가려고 닭장 안에 들어가 보니 이미 죽어있었다고. 카일라는 회사 출근도 미루고 에델을 묻으러 나갔다. 


기분 탓이겠지만 집 안에 무거움이 가득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굿바이, 에델


덕분에 드디어 포틀랜드의 커피를 마셔본다. 주문하다 바리스타랑 정분나는 줄. 무슨 커피 하나 마시는데 선택하라는 게 이리도 많은지. 커피 맛도 모르는 내가 취향이 있을 리 없고 00산 커피가 무슨 맛인지 알 리도 없으니 그냥 대충 끄덕끄덕. 그래서였을까. 맛도 대충.


 

그래도 인스턴트커피보다는 낫지, 안 그래?


오늘 들른 호손 지역까지 합쳐서 SE 지역의 클린튼, 앨버타, 호손 세 군데 스팟을 클리어했다. 뭘 알고 찾았다기보다는 샘의 추천으로 시작했다가 구글맵 덕에 지역이 넓어진 것이고, 어쩌다 보니 이 세 구역이 산책 겸 상점 구경에 최적화된 동네였던 것.


E의 일행과 첫날 구경했던 다운타운을 제대로 못 본 것 같아 원데이 패스를 끊은 김에 잠깐 다녀왔다. 음, 난 왜 이렇게 사람 많고 복작거리는 동네엔 끌리지 않는 것인가. 관광객이라면 다들 커피에 맥주에 도넛에 아니면 쇼핑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상점을 들어가 봐도 이상하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뭔가 큰 걸 놓치고 있는 듯한 찜찜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난 이 도시에 언젠가 다시 올 테니깐. 반드시. 


그리고 그날 저녁.


벽화 찍는 재미가 쏠쏠


간판 찍는 재미도 쏠쏠


빈티지 옷 가게가 정말 많다


고양이 소품 찍는 재미는 더 쏠쏠 1


고양이 소품 찍는 재미는 더 쏠쏠 2


고양이 소품 찍는 재미는 더 쏠쏠 3




딱히 핼러윈 문화가 없는 나라 출신이기도 하고 그런 파티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다 보니 그 문화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게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여긴 포틀랜드가 아닌가.


[Keep Portland Weird]


거리를 걷다 종종 보이는 이 슬로건은, 직역을 하자면 '포틀랜드를 이상한 채로 냅두라' 이겠지만 포틀랜더들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 그냥 이대로 살게 해 주세요' 정도 일거다. 


아침의 일로 카일라가 비통에 잠겨 있을 거라 예상하고 집에 돌아왔건만 왠 걸. 남자 친구의 딸내미 둘과 함께 핼러윈 코스튬을 입고선 사탕을 얻으러 나가는 준비로 집안이 난리부르스다. 슬픔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했나 보다. 함께 가자는 샘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며칠 전 발견한 클린튼 스트리트 극장에서 열리는 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특별 상영회가 오늘 밤 열리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아직 좀 남아 나 홀로 집에 있자니 자꾸 초인종이 울린다. 남의 집 사탕을 내가 나눠줘도 돼... 나? 어여 나가버리는 게 상책이겠다. 


본고장에서 직관하는 핼러윈


1978년 개봉 이후 40년이 넘도록 매주 토요일 자정에 이곳에서 상영되고 있는 컬트 영화의 교과서 <록키 호러 픽쳐 쇼>. 게다가 오늘은 핼러윈데이 아닌가. 티켓은 진즉에 솔드 아웃된 터라 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 도전을, 이대로 살게 해 달라는 포틀랜더들이 궁금하여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스오피스에서 '나 이거 보려고 한국에서 왔는데 정말 한 장도 없을까?'라며 애교 섞인 협박도 해 보았지만, 흥칫뿡. 결국 노쇼 티켓에 희망을 걸고 줄을 섰다. 3번째 순서로 서 있자니 내 앞의 두 사람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남자 둘, 여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자기네들끼리 사인이 맞지 않아 티켓을 네 장이나 사버렸다며 남은 한 장을 살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살게요, 사죠, 왜 안 사요!!


드디어 입장했다!


핼러윈 코스튬 콘테스트가 열린다길래 식전 행사가 좀 있고 영화를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와, 와, 와. 정줄 놓은 포틀랜더들은 오늘 밤 여기 다 모인 듯.


영화 시작 전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 사람들은 전문 배우들로, 영화가 시작되면 이들이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 '립싱크 라이브 쇼'가 펼쳐지는 것이다. 어차피 웃자고 하는 쇼이니 캐릭터들의 남녀 구분은 중요치 않고 심지어 영화 속 캐릭터와 대화도 한다!


식전 행사로 준비 운동


영화 시작 직전. 처음엔 이들이 왜 퇴장을 하지 않는지 궁금했었다


입장할 때 나눠 준 종이봉투 속엔 도대체 어디에 쓰는 용도인지 알 수가 없는 소품들이 하나 가득. 두루마리 휴지, 트럼프 카드, 야광봉, 쌀, 응? 쌀??


의문은 곧 풀렸다. 


영화 초반 주인공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에서 관객들 모두가 무대 위 배우들(주인공 커플을 연기하는)에게 쌀을 집어던진 거다!! 게다가 단체 군무 장면에서는, 두루마리 휴지들이 긴 꼬리를 만들며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녔다!!


나는... 나는... 넋이 나가버렸다. 


영화 속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배우들


결혼식 단체 사진 찍는 중


팀 커리의 재발견


저 세상 흥으로 가득 찬 이 극장 안에서, 아마도 유일했을 동양인 여자 하나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미 한번 봤던 영화이니 대충의 줄거리는 알고 있지만 내용을 알아먹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배우와 관객과 영화 속 배우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케미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굳이 슬로건까지 만들어가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포틀랜더들과 난 이 밤,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냥 저대로 살게 해 주세요, 꼭이요, 꼭!


관객들을 배웅하는 배우들. 가까이서 보니 다들 멀쩡해...


그림일기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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