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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Dec 06. 2022

[D+60] 3분의 2 지점

미국, 포틀랜드

어제 일의 여파로 아침부터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


설마 내가 정줄 놓은 포틀랜더들에 휩쓸려 덩달아 미쳐 날뛸 사람은 아니고. 영화가 끝나고 자정에 가까운 밤, 버스 출발 시간에 맞추려 거의 전력을 다해 약 1킬로미터를 뛰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다리 하나를 침대 밖으로 옮기는 일조차 버겁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물들


다운타운은 가기 싫고 집 근처는 거의 갔고 여차하면 제일 좋았던 앨버타 구역이나 한번 더 갈까 했는데, 오늘이 금요일이라고 재택을 한다는 카일라가 이 시간까지 집에 있었다. 그녀에게 하세월 어슬렁거릴 만한 곳을  추천해 달랬더니 이름도 어려운, '크리스털 스프링스 로도덴드론 가든'을 알려준다. 아주 '뷰우우우우우티플한 곳'이라며 간 김에 그 옆에 붙은 '리드 대학' 캠퍼스도 한번 가보란다. 


그렇게 구글 지도로 대강의 동선을 짜다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브런치 카페를 발견했다. 뭉친 근육도 풀 겸 오늘도 걷기로 했으니 당 충전이 우선이다. 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내 인생 토스트를 만났다. 뭐가 이렇게 맛있는 건데? 신경질 나게 왜 이렇게 빨리 없어지는 건데?? 열 접시도 먹겠다고 생각한 토스트는 네가 처음이야.


카페 내부는 소박했고, 요리는 아주 어려 보이는 총각이 했으며, 벽에 걸린 그림들은 판매 중이었다


인생 토스트. 포틀랜드에서 나는 신선한 식재료들이 범인일 듯


배도 채웠겠다 바람은 좀 불어도 햇빛이 워낙 따뜻해 버스를 타고 도착한 가든을 한 바퀴를 돌고 나니 땀이 날 지경이다. 포틀랜드의 가을은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하던데 이제 와서 미국이 나에게 좀 잘하기로 맘먹은 것 같다. 가든 안에는 온갖 동물들이 있었는데 특히 오리들과 청설모가 나를 쫓아다녀서 좀 당황스러웠다. 순간 내가 이순재 선생님이 된 줄.

 

포틀랜드의 가을을 제대로 느껴보는 중


호수의 물 빛이 너무나 투명하고 깨끗해서 눈이 개안할 것만 같았다


나를 따라오는 오리


전생에 너랑 나랑은 친구였니?


카일라가 추천해 준 리드 대학 캠퍼스는 가든과 붙어있었다. 여행 와서 대학 캠퍼스를 다 가보다니. 도서관 건물이 있길래 무작정 들어갔더니 제지하진 않지만 학교 도서관이라 그런지 책 보다 공부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그 틈에서 샤브작 샤부작 그림 그리기. 어느 도시나 카페보다 도서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게 훨씬 집중도 잘 되고(집중 잘 된다고 그림 실력이 나아지는 건 1도 엄씀) 시간도 잘 간다. 갈 땐 버스로 간 길을, 올 땐 동네 구경하며 씩씩하게 걸어왔다.


대학 캠퍼스를 다 와 보다니


조용히 앉아 집중할만한 곳으로 도서관만한 곳이 없지


오랜만에 해보는 마트 구경. 언제쯤이면 우리의 잡채는 저렇게 긴 이름이 아닌 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감기가 걸려있던 2주간여의 시간은 일기를 쓰는 것도 고역일만큼, 내가 오늘 뭘 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오늘 얼마나 우울한지에 집중해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엔 내가 어떤 기분이었더라 싶어서 지난 일기들을 쭈욱 읽어봤더니 나도 참 해맑았네. 


그러다 사진들이 찍힌 날짜가 '두 달 전'이라고 나오는 걸 보고 처음엔 잘못 봤다 생각했다. 그렇네. 진짜네. 벌써 두 달이 흘렀네. 한 달을 맞았을 땐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시간이라 별 감흥이 없었는데 두 달이라니. 나의 두 번째 한 달은 어디로 간 것이더냐. 그리고 이제 세 번째 한 달을 맞았다. 


이제 '끝'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 거고 그 끝에서 이어질 '시작'에 대한 고민도 많아지겠지. 무엇보다 이 여행에서 내가 얻어가는 게 무엇일지가 가장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확실한 한 가지는, 돌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잘하고 살 거라는 거. 이만큼이나 애타게 보고 싶은 걸 보니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었네 그려.


그림일기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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