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보편적인 슬픔의 진화

우리가 바라보는 슬픔의 서사

by 유자차

누군가 나에게 깊게 슬퍼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조금 생각을 하다가 2018년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의 21년 인생 처음으로 실연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연은 나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일이므로, 나는 이 실연의 아픔을 속수무책으로 체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끼니를 때우지 않았고, 피지 않던 담배를 피워봤고, 수업을 쨌으며, 나 아닌 누군가에 의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나의 슬픔은 탄생됐다. 눈물의 주체가 ‘나’가 아닌, ‘슬픔’이 되는 그 신비로운 순간.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슬픔이 흘리는 눈물. 내 앞에서 슬픔은 의인화됐고, 나는 내 몸을 탐색하는 슬픔을 조금은 신기하게, 조금은 불편하게 쳐다봤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사를 수반한 감정, 슬픔. 이 눈물 한 방울과 함께 나도 슬픔의 신화에 투척됐다.


생각해 보면 슬픔이라는 이 방대한 서사는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감정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진실이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기에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나는 이 보편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나의 슬픔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관찰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글은 나 자신을 관찰하는 보고서이며, 새로운 슬픔을 창조해보려 노력하는 실험이다. 짧은 단상과 상념들, 나를 사로잡은 글귀와 영화들은 나로 하여금 슬픔을 성장시켰다.


제목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슬픔’과 ‘진화’는 이 제목의 제각기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지나치게 보편적인 ‘슬픔’이 어떻게 진화되어 가는지를 탐색하고 싶었고, 동시에 슬픔의 ‘진화’란 지나치게 보편적인 진실이라고 선언을 하고 싶었다. 지나치게 보편적이면 우리는 안일해지고, 나태해진다. 슬픔에게 나태해지는 건 슬픔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오히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구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2018년 겨울에 느꼈던 그 아픔 위엔 이제 상흔만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쓰고, 관찰하고, 견지할 것이다. 나의 슬픔이 그대에게 다가가 그대를 슬픔의 신화로 초대하기 위해.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