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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차 Feb 24. 2021

바라보기와 보여지기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오늘은 어슬렁어슬렁, 10시 즈음에 일어나서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관람했다. 바르다 감독이 80번째 해를 보내며 만든 자서전 – 회고록식 다큐멘터리다. 영화의 서론에서 그녀는 말한다: “사람을 열어보면 그 안엔 하나의 지대가 있어요. 저를 열어보면 해변가가 보일 겁니다.” 그녀에게 해변은 은폐된 기억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영화가 끝나면서 바르다는 현상된 사진들로 만들어진 집 안에서 조용한 감탄사를 토로한다. “여기에 있으면 집에 온 것 같아요… 역시 시네마는 저의 집이었군요.” 


시네마가 집이라는 개념. 그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시네마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고, 감독은 왜 한 인생을 스크린에 반영시키려 하는가. 타인의 삶을 엿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변해가는 가. 


아녜스의 해변을 보며 조금씩 깨닫는다. 


시네마는 기억이다. 

기억의 창고이자 파편이며, 기억의 기억이다. 시네마는 기억을 창조하고, 창조된 기억을 잡아먹는다. 일부러 망각하여 새로운 기억이 피어날 공간을 만든다. 시네마에 의존하기에 인간은 망각의 늪에서 서식하지 않아도 된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는, 삼인칭의 또 다른 존재가 평행이론 속의 우주 안에서 우리를 바라본다는 상상을 한다. 바라봄을 바라보는 시선의 뫼비우스 띠. 스크린과 현실의 동시다발적 줄다리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기억의 윤회다. 


이런 형이상학적 틀에서 아녜스의 해변은 특별한 빛을 발휘한다. 아녜스는 보여지고 있는 아녜스를 바라본다. 여기서 아녜스는 바라봄의 행위자가 되고, 동시에 대상이 된다. 자신을 주체와 객체의 특성을 지니게 한다. 그녀는 보고, 보여진다. 사동과 피동의 동일성 속에서 아녜스는 영화를, 즉 그녀의 삶을 관람한다. 


시네마에 집을 짓고, 시네마 속에서 산다는 건 이런 뜻 아닐까. 나는 나의 기억들을 바라보고, 나의 기억들을 지워가고, 나의 기억들을 창조해낸다.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 속에서 아녜스는 인생을 담았다. 그리고 그 인생한테 작별한다 –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1]


“때론 내가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지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별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그 기억을 
 놓아주기도 한 다는 것을.” [2]


                                                                                                                                                                                                                                                                               (2019.08.02)


          

[1]

 아녜스 바르다는 2019년 3월 29일 서거하셨다. 그녀의 해변이 하늘을 향해있길 바란다.


[2]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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