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1.
대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를 해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이해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대화 없는 삶은 단절된 삶이다.
삶이라는 무인도를 뗏목 없이 헤엄치려 하는 행위이다.
오늘, 친구와 켄모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나눔은 내 삶의 일부를 떼어내서 건네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의 삶 속엔 ‘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건네받은 수많은 타인의 삶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 속엔 ‘너’가 존재하다.
이렇게 우리는 삶을 이어간다.
대화를 나누면서.
2.
인간관계는 곧 삶인 것 같다.
삶이라는 매체 자체는 완전 텅 빈 껍데기인데,
대화와 교류, 공감과 맞장구를 통해 조금씩 삶이라는 그릇을 채워 나가는 것 아닌가.
오늘 저녁엔 두 개의 삶이 나를 채웠다.
저녁은 S와 로워 맨해튼에 위치한 Davelle이라는 일본식 파스타 음식점을 찾았다.
“왜 이렇게 멀리서 만나자고 했어,” S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음식을 주문했다.
스파게티는 맛있었고, 대화는 아름답게 시시콜콜했고, 우정은 두터워졌다.
문득 뇌리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내가 만일 죽으면 사람들이 슬퍼해주겠구나.
저녁을 먹고 해산한 후, 친구 J한테서 전화가 왔다.
상실이 이렇게 슬플 줄 몰랐다고.
나는 상실의 시대로 떠나고, 그는 이곳에 머물러 있다고.
녀석은 나에게 소중한 친구다.
하루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미래의 우리를 한사코 빨리 보고 싶다.
그 날 늦은 밤, 나는 쿠퍼 스퀘어의 카페 창가 쪽에 앉아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컴퓨터에서 흘러나왔다.
노래를 듣다가 문득 울컥했다. 울컥하는 성격이 아닌데, 정말 울음이 확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익숙함에 익숙해져 있구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뭐가 두려운지는 모르겠다.
그냥, 살아있는 게,
삶이라는 아름다움에,
나는 한없이 경건해진다.
3.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은 영혼도 험하다.
말은 곧 우리 안의 상념들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장치이기 때문에,
말이 험하면 생각도 험하다고 우리는 추리해 볼 수 있다.
반대로, 말을 곱게 하면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화자의 영혼과 생각도 고우며, 말과 영혼은 일목요연하게 일치한다.
둘째, 화자의 영혼은 타락했지만 고운 말로 타락한 영혼을 상쇄시킨다.
우리는 두 번째 의의에 생각을 둬볼 수 있다. 타락한 영혼이지만, 고운 말을 하다 보면, 화자의 영혼도 어느새 말의 형태를 닮아간다.
영혼은 속는다. 타락함은 점점 도태된다. 말의 고움에 의해 영혼은 다시 회복한다. 속는 게 아니라 믿게 되고, 믿게 되면서 고움 그 자체가 돼버린다.
그래서 나는 말을 곱게 해야 된다고 믿는다. 우리의 노력으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말일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클로스 업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리가 한 말들을 믿어버린다. [1]
(2019.10.4)
[1]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클로스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