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거리를 거닐면서
최대한 ‘많이’ 살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시간을 측정하는 게 아니라, 용량을 측정하는 단위. ‘길다’가 아닌 ‘많다’.
나는 인생을 ‘길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많이’ 살고 싶다. 인생의 시간성보단 물성이 지금의 나에겐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땐 그 물성의 질감이 더 뚜렷해지는 것 같다 – 그래서 여행으로 하여금 나는 희열을 느낀다.
예를 들어 어젯밤. 고즈넉한 가로등을 따라 파리의 le marais 동네를 배회하며 카페 언저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두 연인을 볼 때.
나는 그 이미지를 조용히 음미하며, 품고,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내 안에 마음의 용량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용량 속에서 나는 슬픔을 현상하는 게 아니라 설렘을 의인화시킨다.
내 안에는 삶에 대한 설렘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슬픔과 불안, 근심과 걱정을 이웃으로 둔 채 설렘은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따금씩 설렘은 큰 파도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le pure café (링크레이터 감독의 영화 비포 선셋의 촬영 장소)에서 설렘은 내 안에서 일렁인다.
설렐 수 있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의 현저한 증거물이자 가장 성실한 대변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 나는 – 여행을 떠난다.
설레고 싶어서, 살아 있고 싶어서.
(2019.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