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된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한 편으론 평온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론 성가신다.
맨날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나는 고요을 고요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문학에서 작가들은 삶을 바다로 비유하는 법이 많다. [1]
삶을 바다로 전제하면,
인간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사가 되며,
인생은 항해사가 이끄는 배가 된다.
우리가 꾸준히 담론화하는 ‘삶의 방향성’과 같은 것들도 바다를 항해한다는 비유법 안에서 우리 자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배를 이끄는 항해사로서 우리는 배의 인원들과 배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바다 위의 배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배의 숙명은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가는 경로를 받드는 것이다. 그래서 망망대해에 오래 떠있는 상황을 만들면 숙명을 이루지 못하는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여기서 삶-바다 비유는 조금씩 흔들린다. 그리고 조금 더 파고들면 이 비유는 붕괴한다.
배의 목적은 A라는 곳에서 B까지의 이송이지만 인생이란 그렇지 않다.
우리가 A를 탄생, B를 죽음이라고 규명한다면, 배는 A에서 B까지의 최단 거리를 계산해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배-항해사의 논리를 인생-인간의 논리 위에 포개 놓는다면?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최단 거리는 자살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무해한 거 같은 ‘인생은 바다 위에 떠다니는 배야’라는 비유는 실은 끔찍한 결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배가 아닌 수상가옥과 더 유사할 수도 있다. A-----B라는 지도 안에서, 우리는 꼭 두 끝만 염두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은 개별식 함수가 아닌 연속 함수이니.
[1]
대표적인 예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헤르만 멜빌의 모비 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