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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차 Jul 16. 2021

멜로 영화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10개의 멜로 영화

1. 봄날은 간다 (허진호, 2001)

때론 우린 인스턴트 라면처럼 금방 끓고 금방 부는 사랑도 해봤을 것이며, 때론 우린 김장 김치처럼 진득하고 정성스러운 사랑도 해봤을 법. 그리고 언젠가부터 뒤돌아보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애써 후회를 뒤로한 채로 앞만 보고 걸어보려고도 해봤을 법. 스크린 속에 담긴 강릉의 새벽은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2. 비포 삼부작 (리처드 링클레이터, 1995, 2004, 2013)

관객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영화. 낭만적인 나는 선라이즈를 제일 좋아하지만, 현실적인 나는 선셋에 훨씬 더 끌리며, 미래의 나는 내가 미드나잇과 공감이 될 시간이 올 때까지를 기다린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대화를 하고 카메라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다닌다. 내가 영화를 찍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링클레이터의 계보를 이어가려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3. 먼 훗날 우리 (유약영, 2018)

이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영상적 비망록. 인생의 한 때에 우린 누군가를 나 자신보다 사랑했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며, 그 사랑이 너무 거대해서 우리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의 부피를 못 견뎌서 우리는 이별을 하지만, 그 이별의 끝엔 당신과 나 모두 안전하게 잘 있을 거라고 다독여주는 따뜻한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나오는 부록은 아직도 나를 눈물 흘리게 만든다. 


4. 로마의 휴일 (윌리엄 와일러, 1953)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을 처음 알게 됐다면, <로마의 휴일>으로 하여금 나는 오드리 헵번에 푹 빠지게 되었다. 특히 머리를 자르고 스쿠터를 타며 로마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헵번의 이미지는 영원히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5. 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 1984)
어떤 상처는 너무 아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정말로 아파하는 자는 침묵하고 관조한다. 영화 초반부의 트래비스는 과거의 상처를 짊어지고 가는 중에 실어증을 앓게 된다. 이 영화는 트래비스의 실어증을 치유해주는 해독제 같은 것이다. 영화는 그의 해묵은 지난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며 관객인 우리들도 그 기억의 파편들을 보며 트래비스와 함께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6. 쓰리 타임즈 (허우 샤오시엔, 2005)

뉴욕의 <Metrograph>라는 소극장에서 본 거장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사랑이라는 정열이 어떻게 시대에 따라 바뀌었는지, 그리고 그 바뀌어진 시대 속에서 사랑은 어떻게 그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비워냈는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걸어 나오면서 내 눈앞에 놓인 전화 부스가 스크린의 한 장면인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영화로 변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7.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1995)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는 말한다 - 20세기의 현대인들은 잃어버린, 혹은 상실된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하여금 존재의 첫 단추를 다시 꾀게 된다고 말이다. <러브레터>는 여러모로 기존의 멜로의 형식을 엎어버린다. 서사는 끝에서 시작해 시작에서 끝을 본다. 세 사람이 복합적으로 연루된 사랑이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어떻게 남겨진 두 사람의 사이를 유영하는지에 관한 성찰이며, 결국엔 모든 진실은 잊혀져가는 시간 속에 있다고 고백을 하는 선언문이다. 또 한 번 나아가, 사랑이란 결국엔 잊혀져가는 것들을 기억해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8. 버팔로 '66 (빈센트 갈로, 1998)

빈센트 갈로는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하면 최대치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감독이다. 그렇게 최대치로 영화를 밀어붙이면서 그는 서사의 멜로성을 상실하지 않게 보듬아주기도 한다. 한 마디로, 츤데레의 사랑방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정말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몸속에선 전율이 흐른다. 


9.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1995)
영화를 보고 난 직 후 내가 쓴 글: 
"가끔, 칼에 베인 손이 너무 아파 팔을 절단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건 더욱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베인 상처 자국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밖에. 그 상처로 인해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낄 테니." 

산다는 건 결국 상처 난 자국이 아물기를 기다리며 또 다른 상처가 나길 은밀히 소망해보는 것 아닐까. 


10. 내 곁에 있어줘 (에릭 쿠, 2003)

 에릭 쿠의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능동적으로 스며드는 영화다. 1시간 반의 러닝타임 동안 이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는 고작 2분 남짓 정도다. 옴니버스식으로 찍은 이 영화는 3개의 개별적 서사가 어떻게 엮히고 연결되고 투과되는지를 이미지와 음악으로 풀어낸다. 지극히 미니멀한 분위기 속에서 3개의 서사는 더욱더 고조되며, 이미지의 차분함과 서사의 격렬함이 결합되는 영화의 마지막 몇 분은 우리가 왜 영화를 보는지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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