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 아이러니: 연극에서 사건의 결말이 당사자들의 의지나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로 끝나는 것. 관객들은 그 뜻을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삶은 드라마틱 아이러니의 향연이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곧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배우이자 관객이다.
과거의 '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름으로,
과거의 '나'는 삶이라는 무대 위의 배우가 되는 셈이다.
그 과거의 '나'를 보는 관객은 현재의 '나'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도래할 일들을 다 알고 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한 말들과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건지도 알고 있다. 현재의 내가 한 때는 과거의 나였으니까.
현재는 과거를 알지만, 과거는 현재를 모른다.
그리고 현재는 언제나 미래에게 과거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는 오늘도 어떤 '나'에겐 미래이고, 또 다른 '나'에게 과거인 것이다.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비늘로 태어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시간이라는 허물을 벗고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능동적 연결고리에서 항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사회학자 심보선은 말했다. 어제는 잘 알겠지만,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수록). 나는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는 알 것 같다. 그는 삶의 드라마틱 아이러니함을 말하고 있던 것 아닐까.
하지만 또 우리가 영화를 보고 연극에 가는 이유도 이 드라마틱 아이러니로 하여금 느끼는 희열을 위해서 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 삶에는 명백한 영화적 요소가 있다. 삶과 영화를 메타포로 연상하는 의지가 아예 수포로 돌아가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가 말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고쳐 써서 '언젠가 우리 과거는 현재의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