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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11 그날 이후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bard Munch)

맨해튼 하늘에 푸른빛이 감도는 굵은 불빛 두 개가 나란히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지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시린 불빛이기도 합니다. 두 불빛은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건물 근처에서 쏘아 올려진 것으로 당시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억하고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추모의 빛'으로 불리며 이날 해 질 무렵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저 모습을 하고 하늘의 별이 된 수많은 무명씨들을 세상의 남은 자들이 엄숙하게 위로하는 밤입니다.







월요일 제가 사는 곳을 포함해 미국 전역에 9•11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지만 희생자들 이름이 하나하나 행사장에 호명이 될 때마다  유가족들의 마음은 여전히 서럽고 아픕니다. 푸른색 리본을 단 희생자 가족 및 동료들이 나와 3000명에 가까운 희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줍니다. 부르면 유가족들 곁에 잠시 그 영혼이나마 머물다 갈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에서

울지 마오


거기 없소


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오


‘항상 당신들 마음속에 함께 있오.’하며 유가족들을 토닥여 줄 것만 같습니다.

그 당시 꼬맹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습니다. 젊은 아내는 희끗희끗 세월을 안고  영원히 젊은 사진 속 남편을 맞이합니다. 제 몸 하나 피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잔해더미에서 다른 이들 구하려다 먼저 간 봉사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있습니다.




8:46 AM(맨해튼 WTC 북쪽 건물 충돌 )

9:03 AM(WTC 남쪽 건물 충돌)

9:37 AM(미 국방부 본부인 펜타곤 건물 충돌)

10:03(기장과 승객들의 기지로  백악관으로 향하던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여객기

 펜실베이니아주 생크스빌에 추락)


 타종 소리에 맞춰 묵념을 이어갑니다.






이곳에 있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안다.
해마다 이 날을 기억하는 것이 아프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이 일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지거나
 2001.9.11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달라.
국방부 장병들은 항상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전사한 동료들의 기억을 기릴 것이다.

-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코로나 전 조카 결혼식이 뉴욕에 있어 작은 아이와 9.11 박물관과 메모리얼 파크 주변을 잠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검은  대리석 주변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쓰여있고, 위에서 아래로 직각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제 기분 탓인지 울음소리처럼 느껴지더군요. 7월 한 여름 땡볕이고 습한데 3000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장소이다 보니 어딘가 서늘한 기운도 느껴지고요. 그날의 흔적은 외관상 깨끗이 복구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일을 겪은 당사자들에게 아직도 진행 중인 더딘 치유의 시간일 거라 생각됩니다. 마치 세월호 유가족들처럼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사진 한 장은  잿더미가 쌓인 곳에 구조 작업을 펼치는 구조대원들의 짧은 식사 시간 같아 보였습니다. 엄마로 보이는 여인과 여자아이 둘이 천사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었어요.  설명을 읽어보니 일부러 타주에서 봉사자들과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하고 싶어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먼 길을 가족들과 함께 달려와 준 고마운 이들이었습니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차를 몰고 횡단을 했냐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 점이 더 감동스러웠습니다. 기꺼이 그 먼 거리를 달려와 준 용기 있는 가족들의 큰 마음이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려 주기에 충분했으니까요. 별것 아닌 섬세한 위로가 더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거든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지옥 같은 구조현장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큰  슬픔을 민간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나누면서 우울의 강도를 조금씩 낮추고 단단해지는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r1JDZpGwij0&si=0CWKcz2x6QL1RCB7





지금도 화면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쫘악 끼칩니다. 경제, 정치, 국방의 심장부를 노린 사건이었거든요. 할리우드 액션영화인 줄 알았더니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진짜테러사건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시민들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의  9.11 사건이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했고요. 이 날 이후로 미국의 정책들이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규(The Scream,1893)




그날 지구촌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뭉크의 작품 <절규>에 나오는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절규>의 작품이  유화, 석판화, 그리고 파스텔처럼 다양한 버전이 섞여 있듯이 <절규>의 모습을 띤 상황 또한 다양할 테지요. 어디 감히 미국의 경제, 국방, 그리고 워싱턴이 공격받을 수 있을 거라 꿈에라도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미국 국민들이 당시 느꼈던 공포는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 그렇게까지 된 걸까요? 제 눈높이에 맞춰 정리해 본 것들입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테러집단인 탈레반(Taliban), 알카에다(al-Qaida), 그리고 IS(Islamic State)는 모두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산물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위치가 눈에 보이실 겁니다. 1979년 12월 29일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에  세워둔 친소 정권이 흔들린다는 거죠. 진짜 목적은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으로  나갈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이지요.




당시 냉전체제였으니 이를 가만 보고만 있을 미국형님이 아니지요. 미국은 이에 맞서 소련에 저항할 수 있는 전사들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큰 틀에서 보면 종교를 믿지 않는 공산주의 무신론자와 이슬람을 믿는 유신론자의 틀로 포장이 된 채로 말이죠. 이슬람어로 전사를 '무자헤딘(지하드를 하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지하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종교적 의무를 말합니다.




  '무신론자들에게 고통받는 우리 무슬림 형제들을 구하자.'라는 구호아래 가장 열정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금수저출신 오사마 빈 라덴(1957-2011)입니다. 9.11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al-Qaida)의 지도자 바로 그 인물이지요. 스승님도 잘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그의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는 이슬람 사상가 압둘라 아잠(1941-1989)의  사상에 감동을 받아 두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무슬림 전사들을 만들기 위한 지원병 사무소를 먼저  차립니다. 이곳에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가 열심히 돈을 대지요. 또한 이웃인 파키스탄에 훈련소를 마련하고  돈과 무기로  전사들을 무장시키고 전투에 내보냅니다. 결국 소련 연방은 전쟁에 지고 해체가 되는 것으로 전쟁은 마무리되는 듯싶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4년(1992-1996) 간  아프가니스탄에 내전이 지속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많은 이들이 파키스탄 국경으로 넘어와 난민촌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들 중 젊고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신학교육을 시키고 군사교육을 시켜 전쟁터로 내보내기도 했지요. 그들 중 물라 오마르(1960-2013)라는 이름의  아프간 무자헤딘출신이 자신의 고향에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만듭니다. 이것이 탈레반입니다. 그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치안 유지에 성공을 하자,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96-2001년까지 아프간 지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철저히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게 된 거지요.





무슬림 전사들을 모으는 단체에서 시작한  알카에다(기본, 1988)는  점차 부패한 무슬림 지도자들, 반 미, 그리고 반 이스라엘을 앞세우며 이슬람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섭니다. 자신들의 전쟁을 종교적인 틀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적을 지원하고 있는 멀리 있는 적을 먼저 무찌른다는 목표아래  9.11 평화로운 화요일 아침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무자헤딘이 변심한 애인처럼 

반미세력으로 돌아서 테러단체로 변질이 되어버립니다. 미국에게도 뼈 때리는 교훈의 시간이었습니다. 테러용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꽁꽁 숨겨두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내민 카드를 거부하고 전쟁을 선택합니다. 결국 2001.10.7일 테러와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고 2달 만에 끝나게 됩니다. 그 여파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생각한 로드맵을 잘 수행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학교, 병원, 도로시설들을 만들어 주고 선거를 치르며  미국식 민주주의가 금방이라도 뿌리내릴 것처럼 착각을 했었습니다. 전쟁이 어디 생각처럼 쉬울까요? 지금 벌어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상황처럼 각국의 이익과 정치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혀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황만 연출될 뿐이지요.






 20년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미군 철수로 종식됩니다. 이 전쟁으로 총 2조 2600달러(약 2619조 원)의 비용을 지출했다고 합니다. 연합군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몇 배로 뻥튀기된 채 인간의 죽음이 숫자 하나만도 못한 냉랭한 현실이  참 무섭습니다. 전쟁의 시작도 과정도 마무리도 정치적 논리와 리더십의 부재로 깊은 상처만 떠않은 허울 좋은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전투력으로 전투에선 이길 수 있지만 전쟁에서 승리는 어렵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말입니다. 9.11 냉전 해체 이후 세계의 경찰이라 자부하며 미국의 해외군사개입 확대를 정당화시킨 측면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20년 지난 지금 리더십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는 미국을 보게 됩니다. 중국에 대한 견제를 다각도로 시도하고 있지만 이제 말발이 잘 서지 않아 보입니다. 다른 우방국들이 알아챘거든요. 예전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중국이라는 대안이 있으니 미국에 대해 절실하지 않다는 것  이러다 미국이 왕따 당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됩니다. 물론 나랏일은 그분들 몫이지만 말이죠. 안에서의 잦은 내분은 로마제국도 쓰러뜨렸으니까요. 








  강렬한 색상, 어두운 색조로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해 준 화가가 또 있을 까요!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노르웨이 지폐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자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복 많은 예술가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반비례했던 것 같습니다. 보기만 해도 금방이라도 불안감이 전염될 것 같은 작품 <절규>를 통해 그의 평탄하지 않은 삶을 들여다봅니다. 




 내가 태어난 요람에는 무슨 저주라도 걸려 있었던 걸까,
 나는 왜 아무런 선택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다른 아무런 선택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죽음의 천사들은
내가 밖에서 놀 때면 따라 나왔고
 봄의 햇살과 찬란한 여름 안에도 있으며,
내가 밤에 눈을 감을 때도
 서서 죽음과 지옥, 영원한 형벌로 나를 위협했다.
 나는 밤에 자주 잠에서 깨어
맹렬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혹시 이속이 지옥은 아닌지 방안을 응시하곤 했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고민이 보이시나요? 그는 19세기 나름 상류층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5살 무렵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뭉크의 삶에 질병과 죽음이 서서히 자리 잡게 됩니다.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큰 누나도 14살에 결핵으로 사망하고요. 개인적으로 어릴 적 엄마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의 자기를 편들어 줄 유일한 아군하나를 잃는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집안의 따뜻한 존재가 엄마였을 텐데 말이죠. 물론 카렌 이모의 섬세한 도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뭉크의 연애사는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하는 떨고 있는 어른 아이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됩니다. 





또 다른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려 평생 고통 속에 지내다 죽게 됩니다. 의술을 불신했던 의사인 아버지와 남동생마저 세상을 떠나고요. 기차역도 아닌데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로 인해  어린 뭉크는 우울감이 친구가 돼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과 자기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이다움을 빼앗아 갑니다. 유일한 탈출구가 그림을 그리는 거였지요.  국립공예학교에 입학하면서 좋은 스승을 만나고 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드디어 회화로 승화됩니다.  






1889년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하게 되면서 인상파 작품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그림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거죠.  그는 인상파, 신인상파에 속한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상징주의 등을 흡수해서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 영역을 구축합니다. 



#인상파: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   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


  # 신인상파: 19세기말 프랑스 회화 운동으로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 이론과 과학성의 뒷받침을 부여하려는 예술 사조.


# 상징주의: 분석에 의해 포착할 수 없는 초자연저인 세계, 내면, 관념 등을 상징, 우의, 표징 등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




 

 뭉크 고유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1892년 무렵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1893년 그의 전성기에 나온 작품이 <절규>이고요. 그의 작품의  특이한 점은  선을 장식이 아닌 심오한 심리적 발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만의 대담하고 솔직한 성적인 표현은 당시 비평가를 포함한 여러 예술 관계자들로부터 쓰라린 논쟁과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논란은 그의 이름이 오히려 독일 전역에 알려지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는 사물을 보는 관점을 더욱 넓히기 위해 다양한 곳에 머물며 활동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다시 노르웨이등 자신의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넓혀 갑니다.





 '사랑과 죽음'을 주요 테마로 한 작품 시리즈가 있습니다. 6개의 그림들에 의해 처음 형성된 이 시리즈는 1902년 베를린 세션에서 "생명의 프리즈(Frieze of Life)라는 제목으로 처음 전시된 이후, 22개의 작품으로 늘어납니다. 예를 들면  한 작품을 팔아야 한다면 그 작품을 다른 버전으로 만들어 채워 넣는 식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 개의 작품 버전으로 그렸습니다. 유명한 <절규> 작품도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 그가 경험한 사랑과 죽음 등을 개인적인 경험을 치러내며 가감 없이 내재시킵니다.





어느 날 해 질 녘에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이었고
 밑으로는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마침 해가 떨어지려는 때여서,
구름이 핏빛처럼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절규가
 자연을 꿰뚫으며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절규를 정말 들었다고 생각했다.
<1892년 1월 22일 니스에서 뭉크가 쓴 일기 중>





뭉크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내면이 가진 문제와 불안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씁니다. < 절규>는 1892년 그의 일기장에 처음 기록된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보는 견해는 다양합니다. 감각을 통해  내적으로 잠재된 불안과 두려움이 환각적 경험을 끌어냈다고 보는 정신과적 썰과 그가 산책하던 당시 화산 폭발의 가능성, 혹은 그가 산책하던 곳 주변이 도살장이 있었고, 죽어가는 동물들의 잊히지 않는 비명소리가 그에게 들려 그렸다는 썰 등 다양합니다. 아무튼 불안하게 설정된 구도와 주변과 유리된 공포 속의 개인은  보는 이의 시선을 강제로 끌어들입니다.

미술관에 걸려 있던 이 작품이 두 번씩이나 도난을 당하고 회수한 사연 많은 작품이기도 하고요.








#흡혈귀(Vampire,1893)  #마돈나(Madinna,1894), 오슬로 뭉크 미술관
마라의 죽음(Death of Marat),1907, 뭉크미술관
The Brooch, 에바 무독지(Eva Mudocci),1903, 석판화




뭉크의 연애사는 더 파란만장합니다. 밀리 탈로(Milly Thaulow)라는 여성과  첫사랑을 경험합니다. 자유분방한 성향을 가진 밀리에게 그는 자주 상처받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투하며 연애 기간 내내 고통을 받습니다. 그녀와 헤어진 이후 "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창조적인 에너지를 빼앗고, 흡혈귀처럼 그의 생명을 빨아들이는 존재"라고 믿게 되었지요. "남자에게 있어서 연애만큼 비참한 일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요. 여자에 대한 혐오 감정을 품고 그려낸 복수의  그림이 <흡혈귀> 같습니다.




두 번째 친구 같은 연인 다그니(Dagny Juel Przybyszewska)는 믿었던 친구하고 결혼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총에 맞아 죽습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으면 잘 살 것이지 30대의 나이로 호텔 방에서 총에 맞아 사망을 하니 뭉크 또한 충격이 컸습니다. 




세 번째 만난 상류층 돈 많은 여인 툴라 마틸데 라르센(Tulla Mathilde Larsen)입니다.


"자신과의 연애를 통해 그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없다." 


뭉크는 고의적으로 툴라를 방치하고 무례하게 굽니다.  끊임없이 그녀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고요.  반대로 그녀는 잡히지 않는 뭉크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묘안을 짜냅니다.


" 결혼해주지 않으면 이대로 죽어버리겠다."


 뭉크를 협박하다 찾아온 뭉크에게 갑자기 총이 발사되어 의도치 않게 그의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에 맞게 됩니다. 어떤 상황일지 상상이 가실 겁니다. 여자에 대한 신비감이 뚝 떨어졌겠지요. 곁에 있어야 할 엄마와 누이는 일찍 세상을 뜨고 정신병으로 평생 고통 당한 여동생의 삶을 지켜봐야 했고  만나는 여인들 마다 평범하지 않으니 뭉크의 일생에 '여자'라는 족속은 혐오 그 자체로 남아 있을 듯합니다. 이후 알코올 중독과 폭력 등 이상행동을 보이면서 정신병원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의 건강 염려증과는 달리 80대 잠을 자다 평화롭게 숨을 거둡니다.



#앤디워홀(Andy Warhole,1984)

뭉크의 절규(The Scream)를 재현

#연합뉴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나무위키, 구글아트 앤 컬처,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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